[인터뷰] ‘기생충’ 제작 곽신애 대표 “무섭고, 두렵고, 설렌 작업”

입력 2019-06-25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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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제작자인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2015년 4월 15페이지 분량의 ‘기생충’ 기획안을 보고 “그동안 없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영화 작업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느낀 현장이었다”고 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보람과 기쁨, 두 가지를 얻었어요. 영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새삼 알았고요.”

영화 ‘기생충’의 제작자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51)는 요즘 그야말로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작업 과정이 준 설렘과 보람은 물론 완성된 작품을 통해 얻는 결실 또한 값지다. 한국영화 제작자 가운데 누구도 오르지 못한 무대에도 처음 섰다.

5월 열린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폐막식, 그 하이라이트인 황금종려상 수상의 자리다.

그렇다고 영광을 만끽할 틈은 없었다. 성과를 되짚어볼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안고 돌아온 직후 영화가 개봉했고, 뒤따르는 일정을 쉼 없이 소화해야 했다.

그러기를 한 달 남짓. ‘기생충’은 23일 누적 관객 900만 명을 넘어섰다. 작품성면에서도, 흥행으로도 두루 인정받은 결과다.

‘기생충’이 9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던 17일 오후 서울 한남동 바르손이앤에이 사옥에서 곽신애 대표를 만났다. 한 달 넘도록 ‘강행군’을 벌이고 있는데도 지친 기색 없이 긍정의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중심을 잘 잡아야지, 이럴 때일수록 헷갈리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지내고 있다”면서도 “내심 일련의 일들이 얼마나 드문 기회인지 잘 알기 때문에 실컷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


● “4년 전 접한 ‘기생충’ 기획안, 읽자마자 ‘없던 영화구나’”

곽신애 대표가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기생충’ 아이디어를 접한 건 2015년 4월이다.

봉 감독은 A4 15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한 ‘데칼코마니’라는 제목의 트리트먼트를 바른손이앤에이에 전달했다. 감독은 2009년 영화 ‘마더’를 이 제작사와 함께 작업한 인연이 있다.

2010년 바른손 영화사업부 본부장으로 출발한 곽신애 대표는 이듬해 영화 ‘커플즈’의 제작을 총괄했고, 2013년 바른손필름 대표이사를 거쳐 2015년부터 바른손이앤에이 대표를 맡고 있다. ‘마더’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아 봉준호 감독과의 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트리트먼트를 받았을 때는 봉준호 감독님이 ‘설국열차’ 후반작업을 하면서 ‘옥자’를 세팅하고 있던 시기였어요. 감독님은 보통 한 편을 세팅하면 그 다음 작품을 출발시키거든요. 처음 읽고선 ‘그동안 없던 영화구나’ 싶었고, 어떻게 완성될지 정말 궁금했어요. 그때까진 기택(송강호) 가족의 침투 완료까지만 아이디어가 나온 상태였어요. 문광(이정은) 캐릭터도 없었고요.”

사실 한국영화 제작자 가운데 봉준호 감독과 작업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곽신애 대표도 마찬가지다. 감독이 제안한 프로젝트가 ‘기생충’이 아니었어도 “무조건 했을 것”이라면서 웃었다.

제작자에게 연출자 봉준호는 어떤 존재이기에 그럴까.

“오래 전에 누군가 저에게 영화를 제작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은지 물은 적이 있어요. ‘당연히 봉준호 감독이지!’ 그랬죠.(웃음) 옆에 있던 사람이 ‘남편이 아니고?’라고 묻기도 했어요.(곽신애 대표의 남편은 ‘은교’ ‘4등’을 만든 정지우 감독이다) 남편과는 한 편을 해봤고, 워낙 ‘특수관계’이니까요. 제작자들 중 80% 이상은 저와 비슷한 마음일 거예요.”

2015년 4월 닻을 올린 ‘기생충’은 2017년 12월30일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이후 촬영과 개봉에 이르기까지 햇수로 5년의 과정을 거쳤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곽 대표는 봉 감독에게 ‘무섭고 두렵고 설렌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돌아온 답장은 ‘뭘 두렵기까지…’였다.

“제가 초짜 제작자라는 걸 감안해서인지 감독님은 아주 안정적인 타이밍에 필요한 부분들을 먼저 제안해 줬어요. 상대방이 최선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주는 감독이죠. 그래서 현장이 누수 없이 잘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합리적이고 유쾌하면서도 보람과 기쁨까지 느낀 과정이었어요.”

곽신애 대표는 ‘영화 가족’이다. 남편은 ‘은교’ ‘4등’을 만든 정지우 감독, 그의 오빠는 ‘친구’ ‘극비수사’의 곽경택 감독이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빈부격차 이야기…“불편함이 에너지가 되길”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한껏 높아진 기대 속에 공개됐다.

제작진은 애초 ‘두 가족의 희비극’이라고 줄거리를 알려왔고, 영화 결말은 물론 대부분 설정까지 ‘스포일러’로 분류해 철저히 감췄다. 때문에 막연히 ‘가족 이야기’라고 예상한 관객이 대다수다.

그렇게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두 가족의 빈부격차가 빚는 처절한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작품의 메시지가 ‘불편하다’는 관객의 의견도 뒤따랐다.

제작자 입장에서도 빈부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곽신애 대표는 “‘기생충’이 다루는 빈부의 문제가 아주 예민한 부분이라 관객도 불편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예상했다”면서도 “그런 불편함에만 머물지 않고 좋은 에너지가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제가 ‘기생충’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느낀 감정은 ‘슬픔’이었습니다. 관객도 슬프게 느끼길 바랐죠. 가슴 아프고 마음이 아픈데, 어쩌면 좋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좀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 과정으로 소통하길 바랐습니다.”

곽신애 대표가 영화의 인연을 맺은 건 1994년이다. 당시 창간한 영화전문지 ‘월간 키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다. 이후 영화 홍보대행사 바른생활의 마케터로도 일했고, 1999년부터 4년간 영화사 청년필름에서 ‘와니와 준하’ ‘해피엔드’ 등 영화의 기획과 홍보를 담당하기도 했다.

‘해피엔드’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이 남편이고, ‘친구’ ‘극비수사’의 곽경택 감독이 그의 오빠이다.

이들은 영화계에서 ‘영화 가족’으로도 통하지만 곽 대표는 남편이나 오빠처럼 어릴 때부터 영화 마니아는 아니었다고 했다. 오히려 시와 소설에 빠진, 작가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영화 일을 시작해 꾸준히 해올 수 있던 힘은 호기심 많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낙천적인 성향 때문인 듯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드라마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운명인지, 1991년 들어간 첫 직장이 출판대행사였는데 그곳에 있는 선배들이 대학 때부터 영화운동을 해오던 분들이었어요. 선배들을 따라 드라마 외주프로덕션으로 직장을 옮기고, 그 곳에서 인연이 닿아 영화잡지 키노 창간 멤버로 합류했어요.”

곽신애 대표는 영화기자로 일한 4년간 “마치 4년제 영화대학을 다니는 것처럼” 엄청난 수업을 받았다고 돌이켰다. “그때 영화가 내 몸에 딱 붙어버렸다”는 그는 “물 흐르듯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남편도 그 무렵 만났다. 정지우 감독이 단편영화를 주로 내놓던 1996년이다.

“그때 3회째인 서울단편영화제에 정지우 감독이 ‘생강’이란 작품을 내놨어요. 저는 다른 감독 인터뷰를 하러 카페에 갔는데, 그 카페에 후배인 임필성 감독이 정지우 감독과 같이 있었죠.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한 게 시작이에요. 해마다 영화제에선 화제작이 나오잖아요. 올해 칸에서 ‘기생충’이 그랬듯이.(웃음) 그때 ‘생강’이 그런 작품이었어요.”

첫눈에 인연임을 직감했을까. 곽신애 대표는 “그런 건 아니다”면서 크게 웃었다.

“남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좋은 말만 해주지 않는 중요한 조언자에요. 힘이 되고 용기가 될 때도 있고, 때로는 머리 싸매고 누울 때도 있어요. 자기반성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곽신애 대표와 정지우 감독은 2008년 영화 ‘모던보이’의 프로듀서와 연출자로 함께 일했다. 앞서 1999년 ‘해피엔드’의 홍보담당자와 연출자로 만난 뒤 두 번째 합작이었다.

영화계에는 제작자인 아내와 감독인 남편이 파트너를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들 부부는 10년 넘도록 협업하지 않는다. “촬영장에서부터 집까지 일이 끊어지지 않아서”라고 했다.

“‘모던보이’를 할 때 서로 의견이 다르면 집에 와서 너무 힘들었어요. 남편도 현장의 어려움을 집에 와서 하소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계속 일하는 상태가 되더라고요. 서로 맞는 제작자와 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죠.(웃음) 이제는 각자의 작업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 좋더라고요.”

정지우 감독은 황금종려상 제작자가 된 아내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이들 부부가 처음 나눈 대화는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네’였다고 한다.

“제 인생에 일어난 빅 이벤트잖아요. 남편은 그걸 아주 즐겁게 구경하고 있어요. 하하! 제가 혹시 오버할까봐 그런지 옆에서 장난스럽게 바라봐 주고 있어요. 남편은 ‘곽신애는 자기 일 하고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마인드가 있어요. 결혼할 때도 누구의 딸, 아내, 엄마가 아니라 ‘곽신애답게 살게 될 거야’라는 말을 해줬죠.(웃음)”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기생충’ 그 이후…“하던 대로 꾸준히”

곽신애 대표는 대학 졸업반 때인 1990년 고향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사회생활을 시작해 29년간 공백 없이 일했다. 영화 홍보와 기획, 제작까지 두루 거치면서도 지금껏 3개월 이상 쉰 적이 없다고 했다. 제작에 본격 뛰어든 건 마흔 살이 넘어서다. 2016년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이 첫 제작 영화다.

“영화 일을 해왔어도 현장 경험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현장과 예산은 어렵고 무섭죠. 속속들이 알 수도 없고요. 궁금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적당한 때를 봐서 물어봐요. 현장에 엄청난 전문가들이 있잖아요. 오래 몸담은 분야에서 더 이상 모르는 게 없는 상태가 됐다면, 그만큼 지루한 건 없어요.”

‘기생충’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여러 결실을 거두고 있다. 24일에는 프랑스에서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달 5일 현지 개봉해 22일까지 총 68만 1122명을 동원했고, 스코어는 이어지고 있다.

‘기생충’은 곽신애 대표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영화 찍는 과정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제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배우 캐스팅과 투자잖아요. 봉준호 감독님 덕분에 그 과정이 수월했죠. 앞으로도 하던 대로 꾸준히 해야죠. 제가 매력을 느끼는 감독님을 만나 그들이 작품을 잘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죠.”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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