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의 해피존] “아따! 볼 빠르다고 다 투수여?”

입력 2019-09-26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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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유희관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29km에 불과하다. 그러나 강속구 없이도 2013년부터 올해까지 7시즌 연속 10승을 거두며 롱런하고 있다. 투수에겐 구속보다 컨트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스포츠동아DB

한국 프로야구 탄생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고(故) 이종남 기자는 레너느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의 우리말 옮긴이로 유명하다. 이종남 기자는 그 밖에 여러 권의 야구 관련 저서를 남겼다. 그 중 ‘야구가 있어 좋은 날’에는 프로야구 초창기 여러 흥미로운 일화가 담겨져 있다.

이 책 30장은 ‘아따! 볼 빠르다고 다 투수여?’라는 이색적인 소제목이 달려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종남 기자는 1983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한양대학교에서 진행된 해태 타이거즈의 훈련 을 취재했다. 불펜에서 엄평재라는 고졸 신인 투수가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던 이상윤을 능가하는 빠른 공을 펑펑 던져 눈길을 끌었다. 취재진이 몰렸고 김응용 감독도 흐뭇한 미소로 이 장면을 지켜봤다. 기자들의 시선이 온통 신출내기 투수에게 쏠리자 한 눈에 봐도 기분이 상한 김용남이 슬그머니 이종남 기자에게 다가와 어깨로 툭 치면서 조용히 한마디를 했다. “아따, 볼 빠르다고 다 투수여?”

30년도 더 된 일화지만 지금 읽어도 김용남의 말은 명언이다. 엄평재는 1983년 1군에서 13경기 등판 기록을 남기고 사라졌다. 김용남은 프로야구원년인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뛰며 통산 52승 50패 13세이브 평균자책점 3.61의 기록을 남겼다. 시속 140㎞의 공은 없었지만 안정적인 제구와 묵직한 볼 끝으로 1983년 13승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첫 번째 우승을 함께했다.

1980년대 초 시속 140㎞는 강속구 투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종남 기자는 투수의 첫 번째 덕목은 컨트롤이라고 생각했다. 시속 140㎞는 리그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투수에게만 주어진 매우 특별한 능력으로 컨트롤과 게임 운영능력 그리고 타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이라고 썼다.

그 때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2019년 140㎞는 더 이상 강속구가 아니다. 올 시즌 KBO리그 투수들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42㎞다. 150㎞ 이상은 던져야 파워 피처로 대접 받는다.
투수들의 공은 더 빨라졌지만 1980년대 기준으로도 너무나 느린공을 던지는 투수가 지금 리그에 있다. 두산 베어스 유희관(33)이다.

올 시즌 유희관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29㎞다. 패스트볼보다 더 많이 던지는 체인지업은 121㎞다. 100개 중 8개는 커브를 던지는데 평균 101㎞다.

스피드건의 숫자만 보면 어떻게 프로에서 뛰고 있을까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수중학교와 장충고에서 유희관을 가르친 유영준 NC 다이노스 퓨처스 감독은 “참 영특하고 활발한 아이였다. 중학교 때까지 반에서 가장 작았다. 키 때문에 야구를 그만두려 해서 어렵게 설득했다. 고3이 되서야 본격적으로 투수를 했는데 빠르게 성장했다. 그 때도 볼 스피드 때문에 평가가 박했다”고 기억했다.

유희관은 고3 때 대통령배에서 완봉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느린공은 프로의 외면을 받았다. 대학에서 정상급 투수였지만 역시 느린공은 프로에서도 무거운 편견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유희관은 2013년 처음 풀타임 선발로 자리 잡아 올해까지 극심한 타고투저 시대를 관통하며 단 한 해도 빠짐없이 10승 이상을 기록했다. 올해는 평균자책점도 3.37까지 낮췄다. 유희관은 강속구라는 재능 없이도 프로에서 치열한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희관은 7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한 뒤 “나는 여전히 편견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인정받을 날이 오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큰 울림이 느껴진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유희관이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고 있는 따뜻한 응원이다.

#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스트라이크존을 77개의 공으로 나눠 공략했다. 그중 자신이 4할 이상 타율을 기록할 수 있는 코스의 공 3.5개를 ‘해피존’이라고 이름 지었다. 타자는 놓쳐서는 안 되는, 반대로 투수는 절대로 피해야 할 해피존은 인생의 축소판인 야구의 철학이 요약된 곳이다.

이경호 스포츠부 차장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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