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리뷰] “마음으로 기억되길”…‘선녀들’ 최재형 선생의 흔적을 함께 밟아 (종합)

입력 2019-11-17 22: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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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들’이 많은 이들에게 ‘페치카(난로)’라 기억되는 최재형 선생의 흔적을 따라갔다.

17일 방송된 MBC 역사 탐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이하 ‘선녀들’)-리턴즈’ 14회에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향한 ‘선녀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들은 최재형 선생의 기념관을 찾았다. 최재형 선생의 고택으로 향하던 ‘선녀들’은 “재력가셨으니까, 집도 굉장히 크실 것 같다”고 예상했다. 설민석은 “최재형 선생은 한 러시아인 부부에게 입양됐고 엄청난 재력을 가진 사람이 됐다. 이 부를 남들과 함께 하며 살았다”라며 “그래서 별명이 ‘페치카(난로)’이다. 이렇게만 살면 본인도 편안하게 살았을 텐데 조국을 잊지 못해 가시밭길로 향한 것”이라고 말했다.

연해주에 있던 안중근의 숙박과 함께 사격연습까지 도움을 줬던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이후에 그의 가족들을 돌보기도 했다고. 설민석은 “최재형 선생의 따님인 최올가님의 기록에 남아있다”라고 밝혔다.


이날 설민석은 “안중근 의사에 ‘동양평화론’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사실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평화론’이 있다. 그 내용은 자신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한 이유에 대한 변명이 서구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중일이 하나로 뭉쳐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기 위해서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일본이 있어야 한다는 글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아시아가 하나가 되어야 하느 것은 맞지만 공평하고 균등한 상황에서 해야한다. 일본이 리더가 돼 한국을 넘보거나 침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한 글이다”라고 덧붙였다.

설민석은 “일본이 실제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기회가 80년대에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라며 “독일이 전범국가지만 선진국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사과였다. 총리가 바뀔 때마다 독일은 거듭 사과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도 독일처럼 했었어야 했다. 총리가 와서 무릎을 꿇고 할머니들께 진정 어린 사과를 해야했다. 그리고 중국에 가서도 사과를 해야 한다. 난징대학살로 30만 명을 죽이지 않았나. 동아시아 3국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기회를 일본이 놓쳤다”라고 덧붙였다.


설민석은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을 설명하기도 했다. 최재형 선생은 4월 참변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설민석은 “1914년이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러시아는 반일감정을 갖고 있어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히 활발히 활동하고자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러시아와 일본은 동맹국가가 되고 이 틈을 타 일본은 연해주를 제 집 드나들듯 다니며 한인들을 탄압하고 독립운동가를 추방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군인들이 우수리스크까지 향한다는 소식에 최재형 선생의 가족들은 최재형 선생에게 도망가라 했지만 가족이 자신 때문에 고문이라도 당할까 그는 떠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일본군에게 잡혀 총살을 당했다”라고 말했다.

설민석은 “그런데 유해를 묻은 땅을 봉토 없이 해놨다. 못 찾게 하려고 일부러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가족들이 유해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일본이 자신들은 모른다고 말했다”라고 말했다.

‘선녀들’은 최재형 선생의 순국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황량한 흙바닥이었고 멤버들은 충격에 빠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민석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가슴 속에 최재형 선생을 묻어두는 것이 소중한 것 같다”라고 전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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