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의 ‘붉은 선비’, “아팠구나…울었구나…풀렸구나”

입력 2019-11-25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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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가 있다면 우리에겐 ‘붉은 선비’가 있었다.
‘붉은 선비’의 원작은 함경도의 서사무가 ‘산천굿’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따 ‘붉은 선비, 영산 각시’라고도 불리는 신화이다.

본래 하늘나라 사람이었던 붉은 선비와 영산 각시는 인간세상에서 부부가 된다. 산에서 글공부를 하다 하산하려는 붉은 선비에게 스승은 네 가지 금기를 알려주지만 붉은 선비는 금기를 어기게 되고 커다란 대망신(구렁이신)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영산 각시의 기지와 지혜로 대망신을 물리치지만 붉은 선비는 큰 병을 앓게 된다. 두 사람은 제물을 준비해 대망신이 죽은 곳을 찾아 산천굿을 베풀고, 이에 죽어가던 붉은 선비가 살아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구전신화가 국악판타지로 환생했다. 국립국악원이 2년을 준비했다는 대작이다. 대본을 쓴 강보람 작가는 붉은 선비의 신화를 현재로 끌어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판타지로 만들어냈다.

학생들을 인솔해 현장학습을 나선 선생 지홍(붉은 선비)이 거대한 산불을 마주하게 되는 장면부터 지홍이 대망신을 껴안고 붉은 선비로 거듭나는 해원까지 총 10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이 중에서 네 개의 장은 네 가지 금기를 사계절과 맞물린 금기의 장이다.
극은 인터미션 없이 1시간 40분을 쉼표 하나 찍지 않고 달려간다.


국립국악원과 크리에이터들의 노고와 고심이 묻어나는 무대였다. 극 역시 인간과 자연의 존재적 모순과 극복의 문제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볍지 않으면서도 명징하게 전달했다.

1장 붉은 산의 산불장면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앗아간다. 반투명 막 뒤로 너울대는 불길을 안무로 처리한 것도 돋보이는 아이디어. 정악단, 창작악단, 민속악단, 무용단에 객원연주자들까지 총출동한 연주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들 정도다.

국악에 끼워 맞춘 뮤지컬도 나사와 볼트처럼 딱 들어맞았다. 등장인물들의 노래는 종종 뮤지컬의 넘버처럼 들렸다. 최영산(얼) 역의 위희경이 3장에서 부르는 영산의 테마곡 ‘너를 꼭 찾아갈게’는 뮤지컬 작품의 넘버라고 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정도다.
가야금 병창의 명인 위희경(민속악단)은 매력적인 음색으로 이 작품의 킬링넘버인 ‘너를 꼭 찾아갈게’를 멋지게 소화했다.


흰사슴 역의 천주미(민속악단, 가야금 병창)도 극의 전개에 꼭 필요한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드러냈다. 천주미가 표현한 사슴의 생동감 가득한 몸짓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박영승(창작악단, 거문고)이 연기한 저승 문지기도 인상적인 캐릭터. 극 중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는 여자아이의 등장이 이 작품에 울림 있는 마침표를 찍는다. 영산이 아이를 붙들고 위로하는 “많이 아팠구나”, “많이 울었구나” 두 마디 대사가 가슴 한 구석을 울렁이게 한다. 슬픔과 고통, 분노와 싸움이 끝나고 이해와 조화의 세상이 열리는 경계. 지홍과 대망신이 거듭나며 문지기는 이 경계의 문을 끼이익 하고 연다.
모든 것이 새로 난다. 그래서 이 마지막 10장의 부제는 해원(解寃)이다.
원통한 마음이, 이렇게 풀렸구나.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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