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공소남TV] 뮤지컬 영웅본색 “깜놀 이장우, 퍼펙 임태경”

입력 2020-01-28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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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빅픽쳐프러덕션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에 잔뜩 기름을 바른 수트 차림의 한 남자가 불타는 지폐로 담뱃불을 붙입니다.

어떻게 보면 허세 끝판왕인데, 이 남자가 하고 있으니 그저 멋질 뿐이죠.

1986년 제작된 홍콩영화 ‘영웅본색’을 상징하는 명장면. 이 간지 좔좔의 남자 이름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바로 주윤발인데요.

요즘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기사에서는 ‘저우룬파’로 쓰게 되어 있는데, 다른 영화도 아니고 이 ‘영웅본색’에서만큼은 ‘저우룬파’가 아니라 ‘주윤발’이죠.

‘저우룬파’는 어쩐지 자장면, 잠봉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영 입에 붙지 않습니다.

영화 ‘영웅본색’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풍미했던 홍콩 느와르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요즘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영웅본색’은 이 영화를 뮤지컬로 만든 뮤비컬입니다.

영화 ‘영웅본색’은 1편이 대히트를 치면서 속편이 계속 나오게 되는데요.

1편과 2편은 오우삼 감독이 감독을 맡았고, 3편은 서극 감독이었습니다. 3편을 만들자고 하니 무슨 이유에선지 오우삼 감독이 감독직을 거절했다는 얘기가 있죠.

영화는 홍콩영화지만 뮤지컬 영웅본색은 한국산입니다.

삼총사, 잭더리퍼, 프랑켄슈타인의 왕용범 연출이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죠. 작곡과 음악감독은 이성준 감독이고요.

공연계에서는 왕용범-이성준 두 사람을 황금듀오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왕용범 연출이 영화 ‘영웅본색’의 엄청난 팬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뮤지컬을 보고 있으면 영화에 대한 연출자의 존중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의 명장면과 명대사를 최대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서 재현하는데요. 이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영화 장면이랑 대사 그대로 갖다 쓰는 게 뭐가 어려워?”할지 모르지만 그건 정말 모르는 소리죠.

영화에서 명장면이라고 그걸 그대로 무대에 가져오면 명장면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정말 순진한 발상입니다. 영화에서의 감동과 무대에서의 감동은 결과 질이 다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영화 속 명장면의 감동을 무대 위에 고스란히 펼쳐놓기 위해서는 대단한 감각과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차라리 원작없이 내 맘대로 만드는 게 속 편할 수도 있겠죠.

왕용범 연출이 이런 점에서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요.

예를 들어 뮤지컬 ‘영웅본색’은 영화 1편의 스토리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속편인 2편의 내용도 일부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국영, 네 ‘장궈룽’이 아니라 장국영입니다.

사진제공|빅픽쳐프러덕션



장국영의 여자친구 페기와 페기의 아빠 고회장은 2편에 나오는 캐릭터입니다. 영웅본색 영화를 1편만 보신 분들은 “어?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기도 하셨을 겁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뮤지컬 ‘영웅본색’에 대한 얘기를 좀 해 볼까요?

뮤지컬 ‘영웅본색’의 리뷰들을 보면 영상미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영상은 이제 뮤지컬 무대예술의 거대한 한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이번 뮤지컬 ‘영웅본색’에서는 그야말로 “뮤지컬에서 영상의 예술적, 기술적 수준이 여기까지”라는 걸 선언하는 듯했습니다.

사진제공|빅픽쳐프러덕션



홍콩의 번잡한 시내라든지 멋진 홍콩의 야경 같은 풍경을 무대 전체에 구현해 배우들이 정말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이 지닌 표현력이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단순히 실제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이 아니란 얘기죠.

예를 들어 홍콩 빈민가의 다닥다닥한 아파트 앞에서 자호와 자걸 형제가 조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아픈 대립이 등장하는 장면인데 밤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죠.

그런데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비가 아니라, 두 사람이 올려다 본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로 표현합니다.

혹시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으신가요? 바로 딱 그 느낌입니다. 굉장한 박력이 느껴지는 장면이죠.

사진제공|빅픽쳐프러덕션



자호가 감옥에서 출소할 때는 눈이 시리게, 과장이 아니라 정말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깔아주고(자호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자호가 복수를 다짐하며 비장한 넘버를 부를 때는 아름다운, 하지만 불타는 듯한 일몰을 보여줍니다.

뮤지컬 ‘영웅본색’은 기본적으로 이성준 작곡가의 넘버들로 구성돼 있지만 장국영이 부른 노래들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Love of the past의 경우 1막의 끝 곡인데, 이 곡은 장국영이 부른 영화 ‘영웅본색’의 주제곡이죠.

2막이 시작되면 왕용범 연출은 또 한번 신박한 연출을 보여줍니다.

1막에 나왔던 몇몇 장면을 2막에서 재연하는데요.

단순한 재연이 아니라 1막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이런 장면이 필요했는지를 설명해주는 장치입니다.

1막을 보면서 “이건 뭐지?”했던 의문이 “아하”하고 해결되는 부분이죠.

이런 신박한 연출은 영화에서는 간혹 볼 수 있었는데요.

뮤지컬에서는 아마 처음 시도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덕분에 이 뮤지컬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고 스토리의 개연성이 강화될 수 있었죠.

이제 출연 배우 얘기를 좀 해봐야겠는데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영웅본색에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자호와 자걸 형제, 그리고 마크죠. 영화에서는 이름이 좀 다릅니다만.

형 자호와 동생 자걸은 나이 차이가 제법 나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형제애가 아주 두터웠죠.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는 길이 엇갈리게 됩니다.

형 자호는 위조지폐를 만드는 암흑조직의 2인자가 되고, 동생 자걸은 경찰학교를 나와 경찰이 되죠.

영화에서 형 자호는 적룡, 동생 자걸은 장국영이 연기했습니다.

그럼 이제 주윤발이 남았네요.

주윤발은 형 자호와 함께 일하는 암흑조직의 일원입니다.

자호의 부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부하라기 보단 형·동생 하는 의형제같은 사이죠. 뮤지컬에서는 마크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제가 뮤지컬을 본 날에는 형 자호 역에 임태경, 동생 자걸은 이장우, 마크는 최대철 배우였습니다.

여기에 자호를 배신하고 그의 빈 자리를 차지하는 악역 아성은 박인배, 장국영 아니 자걸의 여자친구 페기는 헤드윅의 이츠학으로 익숙한 싱어송라이터 겸 뮤지컬배우 제이민이었습니다.

사진제공|빅픽쳐프러덕션



일단 저는 이날 이장우라는 배우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주로 드라마에 많이 출연했던 연기자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니 노래를 왜 이렇게 잘 합니까? 혹시 가수 출신인가 싶어 검색을 해봤는데 음원을 발표한 적이 있긴 하더군요. 그래도 그렇지 ….

소리가 또렷하고, 음도 정확한 데다 성량까지 풍부했습니다. 이번이 뮤지컬 데뷔라는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하더군요.

앞으로도 뮤지컬 무대에서 ‘뮤지컬배우 이장우’를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제공|빅픽쳐프러덕션



주윤발 마크 역의 최대철 배우도 요즘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죠. 제가 최대철 배우를 처음 본 것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했던 ‘온에어 초콜릿(2011)’이라는 작품에서였습니다.

최대철 배우는 무용수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경력을 갖고 있는 배우죠.

굉장히 장래가 촉망되는 무용수였는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콩쿠르 결선을 1주일 남기고 유리에 손목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는 바람에 무용수를 그만두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배우를 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최근 방송에서 공개되기도 했죠. 가스비 낼 돈도 없어서 아내가 음식을 하고 있는데 가스가 끊겼다는 아픈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당시 월수입이 100만원도 안 됐다고 하더군요.

최대철 배우는 마크의 여유로움 … 이라고 쓰고 다소간의 껄렁거림이라고 읽는 마크의 개성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됩니다. 마크가 극 중에서 차례로 겪게 되는 분노, 좌절, 우정을 잘 그렸죠.

마지막으로 임태경 자호.

과연 임태경이란 소리가 안 나올 수 없죠.

완벽합니다.

노래는 뭐 … 품격이 한 차원 다른 수준이죠. 소리에서 황금빛이 납니다. 뭐 그 정도죠. 롱코트도 잘 어울리더군요.

자호 역은 유준상, 민우혁 배우가 같이 맡고 있는데요. 세 사람 모두 멋진 자호를 보여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잠깐 옆으로 새자면,

영웅본색의 주인공은 자호입니다. 적룡이 연기했죠.

이 적룡이란 배우는 주윤발보다 한 세대 전의 배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적룡이 1946년생이고 주윤발이 1955년생이니 아홉 살이나 형님이죠.

장국영은 1956년생으로 주윤발보다 한살 어립니다.

그런데 ‘영웅본색’하면 사람들은 주윤발과 장국영을 떠올리죠. 정작 주인공은 적룡인데 말이죠. 좀 억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뮤지컬로 돌아와서.

아, 제이민 페기가 있죠.

영웅본색은 영화도 그렇지만 남성들만 주구장창 나오는 작품입니다. 느와르 장르 특유의 블랙이 잔뜩 칠해진 벽 한 켠에 화이트로 그려진 수선화 한 송이라고나 할지. 페기 덕에 이 뮤지컬은 어둑어둑한 느와르에 부드러움과 유머를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근육질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얘기죠.

한 가지 더.

브로맨스가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이지만 이런 작품 특유의 클리셰가 없어서 좋더군요. 예를 들면, 이런 거 있잖아요. 남성들의 우정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장면들.

두 팔 벌려 확 끌어안는 포옹이 너무 잦다든지, 팔씨름 하듯 굳게 맞잡는 손. 한두 번 나오면 좋은데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 작품 ‘영웅본색’에서는 많이 자제되고 있습니다.

사진제공|빅픽쳐프러덕션



영화 ‘영웅본색’의 팬이라면 진짜 꼭 봐야 할 뮤지컬입니다.

영화와는 또 다르지만, 같은 수준의 감동과 재미를 안겨 주는 작품이거든요.

여성 관객에게도 부드럽게 소화되는 느와르 뮤지컬입니다.

왕용범표, 느와르 뮤지컬이죠.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 영상은 VODA, 네이버TV, 유튜브의 ‘공소남TV‘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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