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영화 ‘기억의 전쟁’ 감독·프로듀서 “질문이 계속되길” (인터뷰)

입력 2020-02-24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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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을 연출한 이길보라 감독(오른쪽)과 조소나 프로듀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참상에 대한 기억을 다각도로 짚은 작품을 내놓은 이들은 “질문이 계속 되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제공 | 시네마달

시작은 ‘궁금증’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 궁금증을 해결하는 여정,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꺼내는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27일 개봉하는 이길보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제작 영화사 고래)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던 할아버지의 오랜 침묵에 품은 감독의 궁금증으로부터 출발했다.

여정을 시작하고 꼬박 5년이 흘렀다. 베트남 전쟁을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되짚으면서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주목하는 ‘기억의 전쟁’은 한 번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역사에 귀를 기울인다. 비극의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꺼내는 ‘기억’은 지금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건넨다.

‘기억의 전쟁’ 개봉을 앞두고 연출을 맡은 이길보라 감독(30)과 조소나 프로듀서(36)를 만났다.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두 사람은 국내를 넘어 세계무대로 시선을 돌려 다양한 실험을 벌이는 ‘젊은’ 창작자들이다.


○ “내가 알던 베트남 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차이”

이길보라 감독의 할아버지는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다. 10대 때 고등학교를 관두고 홀로 떠난 여행에서 베트남을 처음 찾았다는 감독은 집으로 돌아와 할아버지가 겪은 ‘베트남의 기억’을 물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엄청 무뚝뚝한 분이에요. 할아버지도 전쟁 때 베트남의 다낭을 다녀왔다고 했지만, 그 외엔 별다른 말이 없었어요. 이후 할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돌아가셨죠. 저에게 할아버지는 참전으로 받은 훈장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으로 남아있어요. 그러다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가고 20대가 되고 나서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베트남과 차이가 있었죠. 저의 기억은 왜, 서로, 이렇게 다를까. 그 궁금증이 시작입니다.”

이길보라 감독은 2015년 청각장애 부모에게서 듣고 말할 수 있게 태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데뷔해 주목받았다. 두 번째 영화인 ‘기억의 전쟁’ 역시 가족의 울타리에서 품은 자신의 이야기에 기초한다.

2016년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했고 2017년 조소나 프로듀서가 합류했다. “전문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해온 프로듀서의 역할이 필요한 상황”에서 감독은 조 프로듀서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조 프로듀서는 ‘말해의 사계절’과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등 다큐멘터리 영화에 참여하면서 역량을 키워왔다. 동시에 해외 영화제나 제작진과의 꾸준한 협업으로도 주목받고 있던 터였다.

조소나 프로듀서는 “여성 감독들의 작업에 관심이 높은 상태에서 도전적인 주제를 여성감독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궁금증이 생겨 합류했다”고 밝혔다.

상영시간 79분 분량의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 전쟁 당시 다낭에서 자동차로 20분이면 도착하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3명의 인물이 나온다.

‘그날’의 사건으로 어머니와 형제자매, 이웃집 친구까지 전부 잃은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는 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비극의 현장을 목격한 딘 껌 아저씨는 청각을 잃었지만 ‘한국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모두 죽였다’고 생생하게 기억한다. 같은 날 가족을 잃은 응우옌 럽 아저씨 역시 전쟁으로 두 눈을 잃었다. 전쟁의 피해자인 동시에 목격자이고, 또한 증언자인 이들의 기억을 통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 이면에 가려진 아픔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미처 몰랐고, 한편으론 외면해온 베트남 전쟁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란 주제를 다루는 만큼 촬영은 물론 제작과정도, 개봉하기까지도 녹록치 않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의 한 장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전부 잃은 탄 아주머니. 사과를 촉구했지만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사진제공 | 시네마달


“더 확실하게 말해줄 만한 사람을 섭외하지 그랬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어요. 이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파헤치려는 게 아니에요. 전쟁이 만든 참사를 대하는 다양한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성,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이라는 3명의 인물은 그런 과정에서 주인공이 됐습니다.”(이길보라 감독)

‘기억의 전쟁’에 참여한 스태프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은 이 영화가 내세우는 또 다른 키워드다.

“저희 할머니께 베트남 전쟁에 관해 물었을 때 할머니는 ‘전쟁?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나 남자들이 더 잘 알지’ 그렇게 말했어요. 그 말이 참 이상했어요. 남편이 베트남에 가 있는 동안 가족을 돌보고 살린 건 할머니인데 말이죠. 여성은 왜 전쟁에 대해 한 마디도 못하지…. 이 영화만큼은 여성의 시선으로, 장애인의 시선으로,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이길보라 감독)

“영화에서 탄 아주머니가 한국에 와서 시민법정에 참여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자리에는 참전군인들도 몇 명 있었어요. 탄 아주머니가 ‘사과해 달라’고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그건 마치 평화로 향하는 동작 같았죠. 물론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작업하는 동안 알 수 없는 죄의식이 들었어요. 비록 정식 재판도 아닌 시민법정의 형식이었지만 그 자리에 우뚝 선 한 여성(탄 아주머니)을 보고서야, 어떤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조소나 프로듀서)


○ “용기를 낸 사람들, 그들의 용기에 손잡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아직 제대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제작진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2만5000여 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파병됐고, 당시 약 80개 마을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한다.

영화는 이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도 함께 담는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판단하고 해석하게 이끈다. “베트남에 갔을 때 ‘여기 사람들은 기억의 전쟁을 하고 있구나’ ‘두 가지의 기억 뿐 아니라 여러 기억이 상충하고 대립하고 있구나’”라고 느낀 감독의 판단은 ‘기억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도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재난만 봐도 의견은 분분하잖아요. 그런데 베트남 전쟁에는 한국군이 32만 명이나 갔어요. 전쟁 이후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의견이 나뉘는 건 어쩌면 당연해요. 다른 의견이지만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 그 용기를 보고 누군가 또 다른 용기를 낸다는 게 중요했어요.” (조소나 프로듀서)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하면서도 ‘도대체 이 영화는 무엇에 대한 영화인가’. 그걸 고민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길보라 감독)

영화는 27일 개봉하지만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서 먼저 소개돼 비프메세나상 특별언급에 선정돼 주목받았다. 이후 몇 차례 영화제 상영을 통해 관객에 공개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현장에 매번 함께 한 조소나 프로듀서는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고 돌이켰다.

“50대 여성 관객이었어요. 아버지가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었는데 (영화에 나오는 일은)상상도 해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갖고 오는 미국 초콜릿으로 그 어린 시절의 전쟁을 기억해요. 그 때 베트남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다시 질문해 보고 싶다고 했던 그 관객이 기억이 남아요.”

조소나 프로듀서는 ‘기억의 전쟁’이 촉발하는 ‘논쟁’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영화가 논쟁의 시작이길,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길 바란다”고도 말했다.

2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의 한 장면. 사진제공 | 시네마달



○ 감독과 프로듀서의 ‘다큐멘터리의 시작’

이길보라 감독은 여느 다큐멘터리 연출자들과 비교해도 작업 속도가 왕성한 편이다. 벌써 두 편의 극장 개봉 다큐멘터리 영화를 완성했고, 현재 또 다른 작품 기획에도 돌입했다. 그가 기획 중인 작품은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젊은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인 탤런트 랩의 올해 지원작으로 선정됐다. ‘여성의 몸’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조소나 프로듀서는 허철녕 감독의 ‘말해의 사계절’ 후반작업을 비롯해 몇몇 다큐멘터리 영화의 해외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왜 다큐멘터리 영화의 세계로 들어섰을까.

“대학(연세대 교육학과)을 졸업하고 시사프로그램 PD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한국 다큐멘터리들을 찾아보게 됐어요. 재미있었어요. 극영화는 실화에 가까울수록 ‘리얼리티가 살아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다큐멘터리가 그런 걸 보여주면 ‘속 시원하지 않다’고 해요.(웃음) 되게 이상해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게 무엇이 됐든 사실을 보여주면, 무한한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그 질문은 계속 뻗어나갈 수 있어요.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영화라는 무대 안에서 특수한 존재인 것 같아요.” (조소나 프로듀서)

“다큐멘터리를 하는 이유요? 간단해요. 저에게 다큐는 세상의 ‘창’이에요.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일하느라 주로 집을 비웠는데 저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세상을 배웠어요.” (이길보라 감독)

다만 다큐멘터리가 ‘지속 가능한 작업인가’라는 고민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연출자이자 책을 내는 작가인 이길보라 감독은 ‘예술가로서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늘 고민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필름아카데미로 유학을 다녀온 이유도 그런 갈증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유학을 통해서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결과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영화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기까지의 과정의 중요성을 몸으로 경험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태도로 작업을 이어갈 것인가. 그게 저의 화두로 남았습니다.”

감독은 3월 네덜란드에서의 유학 경험을 묶은 에세이를 출간한다. 제목은 ‘괜찮아, 경험’이다. 아버지가 그에게 늘 건네는 말이라고 한다. 괜찮으니 일단 경험해보라는 응원이자 지지의 표현이다.

조소나 프로듀서는 그런 이길보라 감독을 두고 “10년 뒤가 더 궁금한 연출자”라고 했다. 뒤이어 이 감독이 생각하는 조 프로듀서에 대해 물었더니 답이 길었다.

“저는 조소나 프로듀서와의 작업은 다큐멘터리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시스템은 지금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조소나 프로듀서와 다음 작품도 함께 할 예정인데 함께 ‘좋은 영화인 동시에 좋은 선례를 만들자’고 하고 있어요. 좋은 시스템을 만들자는 데 뜻이 같아요. 잘하고 싶어요.”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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