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토크①] 민영기 “빈부격차 큰 현시대에 ‘웃는 남자’는 꼭 필요한 작품”

입력 2020-02-28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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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인터뷰를 하다 보면 ‘지금 만나길 잘했다’와 ‘왜 이제야 만났을까’로 나뉘는 경우가 있는데 뮤지컬 배우 민영기는 후자에 속한다. 실력이 좋은 배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민영기’라는 이름 석 자 속에 담겨진 이야기가 이렇게 많을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말재주가 참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 그는 매 질문마다 재치 있게 답변을 하며 대기실에 웃음꽃을 피웠다.

민영기는 3월 1일까지 서울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웃는 남자’에서 괴팍한 염세주의자지만 죽을 뻔한 아이들인 ‘그윈 플렌’과 ‘데아’를 받아주며 다정한 아버지가 된 ‘우르수스’역을 연기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이순신’과 같은 영웅 혹은 황태자, 그리고 차가운 신사 등 기품 있고 절도 넘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

민영기는 “20년 만에 처음 맡는 역할이라는 생각을 했다. 겉모습은 곰 같은데 속은 다정한 역할이 내겐 생소한 역할이긴 했다. 다만 출연제의는 3년 전 ‘웃는 남자’ 워크숍부터 인연이 있었다. 그 때 ‘우르우스’를 맡았는데 당시 20kg 증량과 목소리를 긁어내야 한다는 제작진의 요구도 있었고, ‘레베카’ 출연이 확정돼 있어서 거절을 했었다. 그러다 재연에 다시 러브콜을 받아 출연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늘 상류계층만 하다 처음으로 하층민을 맡은 것 같아요. 그래서 우르수스가 취해야 하는 구부정한 자세나 몸의 표현 방식이 너무 어색했었죠. 나름 한다고 했는데 로버트 요한슨 연출이 ‘다 좋은데 노래나 표현이 너무 귀족 같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평소에 했던 연기를 반대로 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연습했죠. 목소리도 변형을 많이 주려고 옛날에 있던 ‘뱀 장수’ 영상도 보면서 연습하고요. 하하. 그러다 보니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많더라고요. 이 작품을 통해 다른 도전을 할 수 있게 돼서 좋았어요.”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초연 배우였던 양준모의 연기도 많이 참고하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민영기는 “더블 캐스팅이라고 해서 완전히 다르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킬 앤 하이드’를 했을 때 조승우의 연습 영상을 찍어 많이 참고했다. 조승우는 초연부터 했기 때문에 더 연구를 했을 거고 몸에 축적이 돼 있을 것이다. 좋은 공연을 위해 그런 좋은 점은 습득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며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롤모델을 꼭 정하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어느 샌가 그 사람의 좋은 창법이나 표현법을 익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연기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절대 똑같을 수가 없어요. 이번에 양준모의 좋은 연기법이나 표현을 배웠기 때문에 저도 ‘우르수스’를 잘 해낼 수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우리 둘 모두 아버지이기도 해서 ‘부정(父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저는 아들을 키우고 양준모는 딸을 키우기 때문에 양육할 때 차이점 등 이야기도 나누고 원작 소설을 보면서 ‘우르수스’의 마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민영기는 ‘웃는 남자’ 프레스콜 당시 양극화된 현대 사회와 작품이 닮아있다는 말에 대해 “‘웃는 남자’가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의 부제가 있다. 그래서 보러 오신 관객들이 돌아가실 때 가슴 한켠에 정의를 다시 생각하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덧붙여 그는 “행복의 가치가 결코 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왕족 출신인 그윈 플렌이 자기의 직분을 던져버리고 다시 하층민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 과정을 보면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요즘 뉴스만 보면 한 숨이 나오죠. 자식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저 역시 ‘우리 아이가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걱정이 많아요. 요즘은 재력이 아주 많거나 없거나로 나뉘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이 넘쳐나고 누군가는 열심히 일해도 돈 한 푼 모으기 힘든 세상이잖아요. 점점 그 간극이 심해지니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비등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가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없으니 연기를 통해서라도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는 남자’는 그런 면에서 주는 메시지가 큰 것 같아요. 정말 많은 것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민영기는 대한민국에서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로 꼽히는 뮤지컬 배우다. ‘레베카’ 공연 당시 ‘댄버스 부인’역을 맡은 신영숙은 “극장이 날아갈 정도의 성량”이라고 그를 극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재능이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민영기는 심지어 어릴 때는 ‘음치’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이유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간 교회에서 본 여학생 때문이라고.

민영기는 “그 여학생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성가대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노래에 관심이 자연스레 가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때 ‘동아리’같은 것을 꼭 들어가야 해서 합창단 오디션을 보게 됐다. 대부분 다 붙는다는 그 합창단에 두 번이나 오디션을 보고 들어가게 됐다. 내 생각엔 내가 불쌍해서 선생님께서 합격 시켜주신 것 같다. 그렇게 바리톤으로 들어가게 됐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라고 말한 민영기의 노력은 빛을 발하게 됐다. 1년간 부단히 연습한 그는 2학년 합창단 정규 연주회 때 솔리스트로 독창을 한 것. 이후 자신의 꿈은 음악을 하는 것이 됐지만 부모님은 이에 반대했다. 그는 “그 때 당시만 해도 ‘음악’하는 사람들을 ‘딴따라’라고 불렀다”라며 “부모님은 내가 남들처럼 대학을 나와 취업하길 바라셨다. 그래서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대학에 갔다”라고 말했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인하대학교 토목과에 들어간 민영기는 자신과는 안 맞는다고 판단, 재수를 결심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마음에 변압기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레슨비를 벌기 시작했다. 6개월간 300만원을 모아 1992년 7월 입시를 시작했고 1년 뒤 한양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때 마침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바리톤 고성현 교수가 부임했고 그의 밑에서 노래를 배웠다. 뮤지컬도 고성현 교수 덕분에 시작하게 됐다.

“군대에 다녀와서 고성현 교수님께 사사를 받고 졸업을 하며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는데 교수님이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어요. 그래서 서울예술단에 입단하게 된 거예요. 성악을 하려고 이탈리아 유학을 준비했었는데 유학보다 시급한 것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뮤지컬을 시작했죠.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서울예술단 ‘태풍’을 시작으로 민영기는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지킬 앤 하이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화성에서 꿈꾸다’ ‘이순신’, ‘삼총사’, ‘잭더리퍼’, ‘모차르트!’ ‘엘리자벳’, ‘더 라스트 키스’, ‘노트르담 드 파리’, ‘레베카’, ‘마리 앙투아네트’, ‘영웅’, ‘명성황후’, ‘인터뷰’, ‘그날들’, ‘햄릿’, ‘마타하리’, ‘안나 카레리나’, ‘웃는 남자’ 등 수많은 공연에서 다른 배역으로 20년 이상의 시간을 관객들과 함께 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을 시간임에도 민영기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그는 “재수를 결심했을 때, 솔리스트를 하며 받은 희열과 박수를 다시 느끼고 싶었고 아르바이트로 했던 ‘부스 코러스’를 하며 보이지 않는 관객들의 환호를 들으며 심장이 떨렸다”며 “그래서 선택한 뮤지컬을 20년 이상 해왔지만 늘 설렌다. 첫 날, 첫 공연은 늘 떨리고 마지막 공연은 늘 아쉽고 절실하다. 같은 공연이지만 오늘과 내일의 내 연기가 다르고 늘 새로운 관객을 만나기에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그가 이렇게 롱런할 수 있었던 자신만의 비결은 무엇일까. 민영기는 “부모님의 좋은 부분을 다 받은 것 같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 하시지만 목소리가 크시고 어머니는 반대로 작지만 노래를 잘 하신다. 두 분의 장점만을 잘 받았다”라며 “그럼에도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날 찾아주는 팬들이 있기에 가능한 거 같다”라고 말했다.

“팬들과 의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공연 끝나고 분장 다 지우고 나오면 팬들이 배우 출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신인 시절부터 사인도 해드리고 이야기도 같이 했었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릴까 가끔은 매니저가 중간에서 막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 사인해드려요. 공연이 끝나면 굉장히 늦은 시각인데 또 절 본다고 기다리시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거절하나요. 변심했다는 말 듣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앞으로 민영기는 나이에 잘 맞는 역할을 하며 배우 생활하기를 꿈꾼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는 배우가 많지 않아서 30살인데 왕 역할이나 ‘오즈의 마법사’의 할아버지 역을 맡았다”라며 “어린 친구들이 수염 붙이고 어르신 연기를 하려니 얼마나 부자연스러웠겠나. 아무리 연기자라고 해도 연륜을 이기진 못한다. 자기 나이에 맞는 캐릭터를 하는 게 배우에겐 가장 좋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뮤지컬 배우들도 연령대별로 많이 있어서 각자 연령에 맞는 역할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자리를 잘 찾아가는 시기가 찾아온 것 같아요. 전 언제까지 뮤지컬 배우를 하게 될까요. 일단 엄홍현 대표는 제가 목소리만 잘 관리하면 70세까지 배우 시켜준다는데, 열심히 관리해야겠어요. (웃음)”

→베테랑 토크②로 이어집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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