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범현의 야구學] ‘손가락의 미학’ 사인의 세계

입력 2017-04-28 05:3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야구는 사인의 스포츠다. 특히 포수와 투수는 ‘무언의 언어’인 사인으로 수많은 의사교환을 한다. LG 포수 정상호가 27일 잠실 SK전에서 투수 임찬규에게 손가락으로 사인을 내고 있다. 잠실 | 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조범현의 야구學’ 3번째 주제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인의 세계다. 투수와 포수 그리고 벤치가 주고받는 사인은 그라운드의 철칙과도 같다. 승부의 향방을 쥐고 있는 ‘또 하나의 언어’인 사인. 그 탄생과 변화과정 그리고 이에 얽힌 뒷이야기에 대해 야구기자 2년차 고봉준 기자가 묻고, 조범현 전 kt 감독이 답했다.


Q : 사인과 볼 배합을 두고 많은 이들이 포수와 배터리코치, 사령탑을 거친 조 전 감독을 전문가로 꼽습니다. 대체 사인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나요.

A : 일단 사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팀의 공동 사인입니다. 이는 모두가 숙지해야하는 철칙이죠. 또 하나는 투수 개인별 사인입니다. 투수는 저마다 갖고 있는 공이 다르기 때문에 사인 역시 천차만별이죠. 개인별 사인의 경우 해당투수와 포수진은 이를 따로 숙지해 경기에 활용해야합니다. 다만, 이 둘은 호환이 가능합니다. 우리 패가 상대에게 노출됐다고 판단되면 즉시 둘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약속을 정하는 시점은 스프링캠프입니다. 여기서부터 내부적으로 사인을 정하죠. 이후 연습경기와 시범경기를 통해서 사인이 완성됩니다.


Q : 그렇다면 사인의 종류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A : 워낙 종류가 많아서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일단 세 가지 정도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야구계에서 흔히 쓰는 용어로 키 사인, 플러스 사인, 몸 사인이 있습니다. 키 사인의 경우 ‘엄지손가락을 핀 다음 동작’, ‘주먹을 쥐고 난 다음 동작’처럼 특정 제스처 이후 나오는 동작을 진짜 사인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일컫습니다. 플러스 사인은 말 그대로 더하기입니다. 손가락을 하나 펴자마자 두 개를 추가로 피면 세 개가 되죠. 이러면 ‘3’에 맞춘 구종을 던지라는 뜻입니다. 3이 커브일 경우 투수는 해당 구종을 던지게 되겠죠. 몸 사인은 신체 구석구석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 포수 마스크 등 다양한 부위를 만지는 사인입니다. 몸을 쓰는 이유는 간혹 시력이 좋지 않은 투수들을 위함이죠.

포수 사인. 고척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Q : 자세한 설명을 들을수록 참 복잡한 세계로 느껴집니다. 선수와 코치들 역시 공통의 사인을 숙지하는 일이 쉽진 않아 보입니다.

A : 사인이란 약속이 참 어려운 이유는 상황별로 세분화돼있기 때문이죠. 약속한 대로만 경기를 진행하면 문제가 없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큰 변수는 주자의 유무입니다. 누상에 주자가 없다면 기존 약속대로 한 번에 사인을 내면 됩니다. 그러나 주자가 나가면서부터 사인이 복잡해지죠. 일단 1루에 주자가 나갈 경우 포수는 1루주자가 나를 보고 있는지 꼭 확인해야합니다. 안 보는 척하면서도 주자의 눈은 포수의 손가락을 향해있기 때문이죠. 이때 포수는 오른쪽 다리로 손가락을 잘 숨기면서 사인을 내야합니다. 앉는 자세와 위치 역시 신경을 써야합니다. 주자가 2루에 있는 경우도 조심스러운 상황이죠. 최근엔 이러한 일이 줄었지만, 과거엔 2루주자의 ‘사인 훔치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투수와 포수는 더욱 복잡하게 사인을 주고받아 주자가 알아채는 일을 방지해야합니다.


Q :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사인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대 초창기와 비교해봤을 때 30여년이 흐른 지금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A : 프로야구 출범 당시에는 사인이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데이터도 많이 없던 시절이었고, 구종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은 디테일한 자료들이 탁자 위에 수두룩합니다. 경기 전엔 코칭스태프 전력분석 미팅을 통해 1차로 상대기록을 확인할 수 있고요. 이 타자가 어느 볼을 잘 치는지, 어느 카운트에 강한지 한 눈에 알 수 있죠. 따라서 사인과 볼 배합 역시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최종 결정됩니다.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Q : 현대야구로 넘어오면서 수비시프트는 빼놓을 수 없는 경기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투·포수의 사인은 수비시프트와 직결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 두 가지를 함께 조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A : 딱 잘라 말하면 수비시프트가 우위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수비수들이 위치를 먼저 잡은 다음 볼 배합 사인이 결정됩니다. 상대타자 유형에 따라서 이에 맞는 수비시프트가 선행됩니다. 이 때문에 포수는 늘 수비위치를 신경 쓰면서 타자를 상대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쉽지는 않습니다. 수비가 왼쪽으로 치우쳤다고 해서 타자에게 늘 몸쪽공만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수비시프트와 볼 배합의 딜레마이긴 한데 여기서 포수의 능력이 발휘가 되곤 합니다.


Q : 포수의 능력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그렇다면 경기에 들어간 뒤로는 투·포수 사인의 주도권을 누가 쥐는지 궁금합니다.

A : 기본적으로는 포수의 몫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포수가 신예급이면 배터리코치가 관여를 하게 됩니다. 벤치 창구를 배터리코치로 단일화하는 이유는 투수코치가 함께 관여할 경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일단 상대 타자의 당일 컨디션을 가장 잘 파악하는 선수가 바로 옆에 있는 포수입니다. 타자가 이날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어떤 구종을 노리고 있는지, 배터박스 안에서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지 등 덕아웃에선 알 수 없는 상황을 포수는 알고 있습니다. 포수의 경험과 노련함은 사인을 결정하는데 있어 막대한 몫을 차지합니다. 포수가 베테랑이면 감독은 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반면, 경험이 부족한 포수는 벤치가 사인에 관여하게 되죠. 저 역시 감독 시절 이러한 기준을 두고 포수진을 운용했습니다. ‘한국시리즈 우승 뒤엔 좋은 포수가 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정리 | 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