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그는 벤치에 앉지 않았다

입력 2017-10-13 05:30:00

NC 이호준. 사진제공|NC 다이노스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흘러갔구나.
프로에서만 스물네 번째 시즌.
이젠 떠나야 할 때.

그라운드의 24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신인시절 김응룡 감독 방에 불려가 통닭 두 마리를 먹으며 체중 늘려야 했던 그때.
훈련이 싫어 도망쳤다 아버지에게 잡혀와 곤욕을 당했던 그날.
‘최정 삼촌’보다 아빠가 야구를 더 못한다며 펑펑 울었던 딸….

‘꼰대’가 되기 싫어 늘 웃었고
고참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 차지하는 모습이 싫어 늘 이를 악물었다.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고 말하지만 거저 얻은 것은 없다.

내 생애 마지막 가을야구.
나의 야구는 언제 멈출 줄 모르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내’가 아닌 후배들. 난 그저 후배들을 거들 뿐.
후회는 없다. 아니 행복했다. 그래, 나는 행복한 야구선수 이·호·준이다.


2017년 시즌 막바지 KBO리그는 이승엽(41·삼성)의 은퇴투어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전 구단이 한 선수를 성대하게 떠나보내는 뜻 깊은 행사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야구장에서 종종 마주친 이호준(41·NC)의 뒷모습은 평소처럼 우뚝해 보이면서도 살짝 애수가 묻어났다.

8월 9일 인천SK행복드림 구장에서 이호준과 잠시 마주 앉았다. 언제나 밝고 유머러스한 ‘큰 형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 없이 진지했다. “순위 다툼이 치열한 순간이다. 조심스럽다. (팀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력이 안 되면 1군 무대에 있을 수 없다. 은퇴를 앞두고 있어 괜히 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싫다”고 했다.

이날은 마침 NC의 인천 시즌 최종전이었다. SK는 팀의 우승 멤버였던 이호준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 이호준은 진심으로 SK와 인천 팬들에게 감사해했다. 이후 각 구단은 이호준이 최종 경기를 치를 때 마다 꽃다발을 안겼고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친정 SK 와이번스가 마련해준 최종전 기념식에서 고별사를 하고 있는 이호준. 사진제공|SK 와이번스


이승엽 같은 성대함은 없었지만 시기나 질투 역시 조금도 없었다. 어떤 날은 끝내기 안타로 이긴 홈 팀이 기쁨을 만끽하느라 허둥지둥 꽃다발 전달을 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깊이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했다.

이호준은 그라운드 뿐 아니라 덕아웃과 클럽하우스의 스타다. 프로에서만 스물네 번째 시즌을 치르고 있지만 언제나 푸근하게 후배들을 대한다. NC 덕아웃에 항상 생기가 넘치는 데는 이호준의 유머가 큰 몫을 차지한다.

신인시절 매일 밤 해태 김응용 감독 방에 불려가 통닭 두 마리를 먹으며 체중을 늘려야 했던 일화, 훈련이 싫어 도망쳤다 아버지께 잡혀온 일, ‘사실 최정(SK) 삼촌보다 아빠가 야구를 더 못한다’는 고백에 딸이 펑펑 울었던 사연, 야구선수가 된 첫째 아들이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반에서 1등을 해서 큰 일이라는 ‘행복한 고민’까지. 그의 말에는 항상 큰 웃음과 함께 잔잔한 감동도 동반된다.

9월 30일 시즌 마산구장 최종전에서 이미 이호준의 은퇴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호준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호준의 은퇴식. 사진제공|NC 다이노스


그러나 프로야구 선수 이호준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롯데와 준플레이오프 3차전이 열린 11일 마산구장. ‘대타’ 이호준은 경기시작부터 5회말 2사까지 단 한번도 덕아웃 벤치에 앉지 않았다. 배트 2개를 번갈아 들고, 때로는 동시에 쥐고 스윙을 하면서 상대 투수와 타이밍을 맞췄다. 비록 몸은 덕아웃에 있지만 1회부터 5회말까지 수 십 개의 공과 조용히 자신만의 승부를 했다. 그리고 2사 1·3루 대타 이호준은 실제 타석에 서서 1타점 적시타를 때렸다.

이호준은 12일 “단 한번의 중요한 순간에 나서는 입장에서 당연히 이렇게 준비를 해야 하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수 없다. 항상 투수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11일 창원 마산야구장에서 '2017 타이어뱅크 KBO리그'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 3차전 롯데 자이언츠와 NC 다이노스 경기가 열렸다. 5회말 2사 1,3루 NC 대타 이호준이 1타점 적시타를 치고 있다. 마산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치열한 가을야구 격전지의 중심에서 이호준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해 보였던 신생팀에서 짧은 시간에 가을야구 명승부를 펼치는 팀원들이 있기 때문에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따뜻한 눈빛으로 동료들을 바라본 이호준은 “이대로만 가면 지금 여기 있는 젊은 친구들이 소중한 전통을 간직한 명문구단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떠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고맙고 다행이라는 마음 뿐이다“며 미소를 지었다.

마산 |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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