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타임라인] ‘원조 한류아이돌’ 양수경…“세 아이들 지키기 위해 돌아왔어요”

입력 2016-08-26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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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양수경이 돌아왔다. 17년 만에 이름을 내건 미니앨범을 발표한 양수경은 남편과 여동생을 차례로 잃는 시련을 겪었지만 용기를 내 다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사진제공|오스카이엔티

■ 잊혀진 17년, 그녀가 꺼낸 이야기

명멸하는 수많은 별들 가운데서 유난히 반짝였던, 그래서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또렷하게 추억되는 별들이 있다. 안방극장과 스크린, 무대 위에서 당대 대중과 함께 교감했던 이들. 스포츠동아가 그 반짝인 별들의 자취를 새롭게 조명한다. 그들의 지나온 삶, 못 다한 이야기들, 거기 담긴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과 여정을 따라가며 추억하는 것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남편과 여동생 잃고 한때 대인기피증
‘난 엄마니깐…’ 용기 내고 다시 선 무대
“쉰살 넘어도 난 여자…화장품 모델 꿈”


소름 돋는 절창이 아니어도, 부드러운 호소력으로 충분히 감동을 주는 가수. 노출이 없어도 노래 부르는 그 몸짓만으로도 섹시했던 여가수. 이별노래를 많이 불렀지만 사랑스런 이미지의 가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가요계를 수놓았던 양수경의 모습이다. 1999년 9집 이후 가요계를 떠났던 양수경이 최근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니앨범 ‘양수경’을 내고 17년 만에 돌아와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 돈을 벌고 싶었던 소녀

2남2녀 중 맏이였던 양수경은 어릴 적부터 목표가 분명했다. 소신도 뚜렷했다. 여섯살에 “가수가 돼 돈 많이 벌어 큰 집을 사주겠다”고 부모에게 약속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가수는 신비로워야 한다”는 소신까지 가졌다. 이를 위해 “서울 신당동 떡볶이집을 한 번도 가본 적 없”을 만큼 심심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주변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켰다. 가야 할 길이 명확했던 그로선 주위의 방황하는 친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모두가 어려웠던 1970년대, 양수경의 부모는 서울 태릉 인근에서 리어카에 생선을 싣고 다니며 팔았다. 성실했던 부모는 고생 끝에 생선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다리도 덜 아프고, 먼지도 덜 마시며 뙤약볕을 피하게 된 부모를 보며 어린 양수경은 “꼭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을 큰 집에서 편하게 모셔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집은 넉넉지 못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했다.”


● 사랑과 헌신, 희생

1985년 첫 음반으로 쓴 맛을 봤지만, 1989년 발표한 ‘바라볼 수 없는 그대’가 히트하면서 양수경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버는 대로 어머니에게 모두 갖다 드렸다. 그리고 더 이상 생선장사로 고생하지 않길 바랐다. 이후 발표한 노래도 계속 인기를 모으면서 양수경의 부모는 생선가게를 운영하지 않아도 됐다. 양수경의 뜻이었다. 생선장수 부모가 부끄러워서가 결코 아니었다. 고생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속 생선장사를 하시게 하고 가게를 좀 더 넓혀 드릴 걸 그랬다. 부모님이 하고 싶은 일을, 내가 못하게 한 것 같다.”

대학(서울예대 영화과) 시절 양수경은 “거의 매일 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 꾸미고 치장할 돈이 아까웠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꾸미고 다닐 걸…. 스무살이면 한참 예뻤을 때인데.”

양수경은 1998년 1월 고 변대윤 예당엔터테인트 회장과 결혼 후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1998년 1월10일자에서 “두 사람은 현재의 경제여건을 감안해 신혼여행을 생략하고 경기 신갈의 빌라에 신접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양수경이 다시 가수로 돌아올 용기를 낸 것은, 남편과 사별한 후 “자녀를 지켜야 한다”는 당면과제였다.


● 원조 ‘한류 아이돌’

양수경은 조용필, 계은숙에 이어 일본에서 크게 주목받던 ‘한류스타’이기도 했다. 2집 녹음 당시인 1989년 6월 ‘동경세계가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진출을 시도했다. 그해 일본 도시바 EMI레코드사와 계약한 20대 초반의 양수경은 이듬해 1월 ‘사랑의 세레나데’를 발표해 일본레코드대상, 전일본유선방송협회음악상, 일본유선방송연맹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데뷔 싱글은 30만장이나 팔리는 히트를 기록했고(동아일보 1990년 7월20일자), 이듬해 음반도 50만장이 판매됐다.

그가 17년 만에 돌아오면서 일본에서도 다시 활동 제안을 해오고 있다.

“어렸을 때는 ‘왜 하냐’며 성실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이제는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잘 해보려 한다.”


● 세 번의 이별, 지독한 후유증

양수경은 지금껏 살면서 세 번의 아픈 이별을 경험했다.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여동생이다. 말 없고, 성실하고, 착하기만 하셨던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10여년 전에 떠나보냈다. ‘아버지’는 가장 아팠던 이름이었다. 양수경은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2013년엔 남편과 사별했다. 자신의 가수 활동을 매니지먼트했던 남편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양수경은 채무까지 대신 갚아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에 앞서 2009년에는 여동생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너무 충격을 받아 양수경은 공황장애를 앓았다. 남편이 떠난 후에는 대인기피증까지 더해졌다. 지독한 이별의 후유증이었다.

“동생과 남편이 그렇게 되고, 원치 않은 일들이 자꾸 생기니까 자꾸 숨게 되더라.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사람 만나는 일에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다.”

양수경은 사별한 남편 사이에 아들 하나를 뒀다. 지금은 셋으로 늘었다. 먼저 간 여동생의 두 아이를 입적시켰다.

“나도 열심히 활동하고 살아야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인기를 회복하고 히트하는 건 둘째 문제다. 말로 하는 교육보다 내가 살아있는 교훈이 되고 싶다. 나 또한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 언제나 여자이고 싶은 ‘엄마’

자신에게 엄격했던 양수경은 억척스런 엄마가 됐다. 스스로도 “치맛바람이 아니라 ‘태풍’ 수준”이라 할 만큼 자녀교육에 열성이다. 아이들은 운동도, 음악도 1등을 했다. 유명 사립초교에 보내 전교회장까지 만들었다. 지금 세 자녀는 미국 유학 중이다.

“이제는 방목이다. 부모가 잡아줘야 할 때가 있고, 놔줘야 할 때가 있다. 잡아주는 시기는 지났고, 이제는 혼자 씩씩하게 잡초처럼 커야 한다.”

양수경은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가수는 신비로워야한다’는 중학교 때 소신을 성장해서도 지키고 있다.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은 것도, 붐비는 장소에 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며칠 전 소속사 직원들과 커피전문점을 찾았다가 “이런 곳에 처음 와본다”며 신기해했다는 일화는 그 소신의 단면이다. 그만큼 세상과 단절돼 살기도 했다.

양수경은 컴백을 준비하며 14kg를 감량했다. “여자는 예뻐야” 하고, “무대에서는 특별한 여자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무대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내 모습을 보니 여자로서 매력이 없더라.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살을 뺐다.”

양수경은 지금 화장품 모델을 꿈꾸고 있다. 쉰 살이 되고 누구의 엄마로 살다보면 많은 걸 포기하게 되지만, 양수경은 “쉰 살 넘은 여자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화장품 모델은 여자 연예인들에겐 꽃이 아닌가.”

양수경은 자신을 “부드럽고 따뜻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라 했다. 그리고 “소름끼치게 좋은 것보다 잔잔하고 애잔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고 덧붙였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양수경은 일본에서도 주목받은 한류스타이다. 일본 진출을 앞두고 1989년 발표한 음반의 재킷 사진 속 모습(왼쪽 첫 번째). 이듬해 일본 레코드대상 등 여러 음악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다.(가운데) 50대가 된 지금도 그 분위기는 여전하다. 사진|스포츠동아DB·오스카이엔티



● 양수경


▶1965년 전남 순천 태생. 서울국악예고, 서울예대 졸업
▶1984년 고교시절 ‘친구생각’으로 첫 음반 발표,
▶1988년 ‘떠나는 마음’으로 정식 데뷔
▶1994년 해태 타이거즈 이종범·선동열과 투앤원(Two&One) 결성
▶대표곡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그대는’ ‘바라볼 수 없는 그대’ ‘내일이 오면’ ‘사랑은 차가운 유혹’ ‘이별의 끝은 어디 있나요’ ‘비혼’ 등
▶1989년 동경가요제 특별상, KBS(∼92년)·MBC 10대 가수상(92년)
▶1990년 전일본 유선방송협회 음악상, 일본유선방송협회 신인상
▶1992년 일본 NHK 아시아 5대 스타상, ABU 국제가요제 최우수인기가수상
1994년 동유럽 가요제 백야축제 대상, ABU 국제가요제 최우수인기가수상

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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