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문권모]한한령 뒤에서 웃었던 중국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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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콘텐츠 키우는 中, 문화굴기로 영향력 확대 꿈 꿔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생각해 보면 그때 중국 방송 관계자들은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양국 관계가 빠르게 얼어붙었을 때 말이다.

2016년 7월 사드 배치가 확정되자 ‘한한령(限韓令)’이란 이름의 비공식적 한류 제재 조치가 가시화됐다. 한국 드라마 방영이 무산됐고, 케이팝 그룹의 현지 공연이 하루아침에 취소됐다. 한한령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당시 한국 방송가에선 ‘차이나 온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 편중 현상이 심했다. 우리 문화계는 그야말로 비명을 질렀다. 한국의 반응이 그러건 말건 중국 정부는 거침이 없었다. 한류를 규제하면서 자국 방송문화 산업의 대대적 육성에 나섰다. 미리 세부 계획을 세워둔 듯한 느낌이었다.

2017년 중국 정부는 창작 드라마를 늘리기 위한 5개년 계획을 만들고 시청률 조사 관리 규범화 의지를 밝혔다. 지난해에는 국무원 주관 부서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해외 프로그램은 황금시간대(오후 7∼10시) 방영을 할 수 없게 했다. 외국인이 TV 드라마의 작가와 감독을 동시에 맡지 못하게 했고, 남녀 주인공이 모두 외국인인 드라마 제작을 금지했다. 반면 중국 방송사들이 한국 콘텐츠를 베끼는 행위는 방관했다. ‘윤식당’의 콘셉트를 그대로 가져간 ‘중찬팅(中餐廳)’은 높은 인기에 힘입어 최근 시즌3 제작 계획을 발표했다. ‘프로듀스 101’은 ‘어우샹롄시성(偶像練習生)’으로 ‘재탄생’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완제품’ 수입은 막으면서도 ‘설계도’ 역할을 하는 포맷 거래는 가능하게 숨구멍을 틔워놓았다. 한국 콘텐츠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노하우를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포맷 거래에서는 원작 프로그램 제작진이 ‘플라잉 프로듀서’란 이름으로 현지에 가 코치 역할을 한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 정식으로 포맷을 사간 중국 방송사와 무단으로 포맷을 베낀 경쟁사가 서로 먼저 프로그램을 론칭하기 위해 다투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올해 들어 한한령을 풀어주네 마네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지금 중국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서도 충분히 수준이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어서다. 한류 붐이 불었을 때 중국에 갔던 한국 PD들이 하나둘 귀국 짐을 싸고 있는 게 증거다.

사실 지금 중국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글로벌 문화굴기(倔起·떨쳐 일어남)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 방송 영화 음악 등의 콘텐츠를 고부가가치 문화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이후 한국이 채택했던 방향이기도 하다. 실제로 중국 정부가 2017년 내놓은 ‘드라마 진흥을 위한 정책 통지’에는 우수 드라마의 해외 진출 지원책이 들어 있다. 둘째, 문화를 통해 중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고, 중국에 대한 세계인의 친밀도를 높이며, 궁극적으로 중국 상품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는 서구와 일본의 문화상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요즘 동남아에선 드라마 시장의 틈새를 중국 드라마가 파고드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는 ‘퍼시픽 림: 업라이징’이나 ‘콩: 스컬 아일랜드’에서처럼 할리우드 영화에 중국 배우가 감초처럼 등장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될 때 중국 영화사 로고가 나오는 것도 드물지 않다. 요즘 나온 할리우드 영화에서 중국인 악당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이 다 차이나 머니의 힘이며 문화굴기의 단면이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문화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렇잖아도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들이다. 중국이 문화굴기를 이뤘을 때 한국 대중문화가 밑거름이 됐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류의 발전에 더욱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mikemoon@donga.com
#한한령#윤식당#프로듀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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