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문재인과 조국의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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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文 취임사 名句 만신창이로 이 땅 현실 부정, 가상의 나라 꿈꾸다
본인 현실·허물도 부정한 것 아닌가… 조국과 같은 우물에 빠진 대통령
北 실체 눈 감고 지소미아 파기 통보… 안보 냉엄한 현실 못 보면 국민 위험

박제균 논설주간
박제균 논설주간
‘조국 사태’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의 명구(名句)가 만신창이 되고 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대목이다.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힘 있는 자에게만 그렇다’는 단서가 빠졌다는 것이다. 주술(主述)을 바꿔 ‘평등은 기회 있는 사람만, 공정은 과정일 뿐이고, 정의는 결과에 따라 다를 것’이란 패러디도 나올 법하다.

대통령 취임사라는 게 대체로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나열이고, 당선의 격정에 좀 오버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너무 나갔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는 지상(地上)에 구현하기 어려운 이상향에 가깝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좋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그렇게 될 거라고 단언하는 건 곤란하다. 과연 지금 그런 나라가 도래(到來)했다고 여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태 당사자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야말로 자신이 쏟아낸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말과 글의 무게에 치여 허덕이고 있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글로써 업(業)을 쌓고 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조국은 본인이 늘어놓은 그 숱한 말과 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와 자신의 실제 삶과의 괴리가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까.

장관 될 생각을 하고,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걸 보면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또 궁금해지는 것이다. 조국은 그가 잘 쓰는 표현대로 ‘지식인’ 또는 ‘학인(學人)’이 마땅히 갖춰야 할 덕목인 객관화(客觀化)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부정하고 ‘공정하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가상현실의 나라’를 꿈꾸다 보니, 본인의 실제 삶이 내뿜는 단내를 부인하고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가상현실에 빠진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강남좌파 지식인들이 흔히 빠지는 내로남불의 함정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람은 문 대통령이다. 외교안보와 경제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렸지만 단 한 사람, 김정은만 돌아서면 모든 게 한꺼번에 풀릴 것이란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김정은에게 ‘평화경제’ 같은 큐피드의 화살을 날리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미사일이다. 미사일만 쏴도 괜찮은데 “중재자 행세 그만하라” “정말 보기 드물게 뻔뻔한 사람” “아랫사람이 써준 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다”고 조롱까지 한다.

그래도 김정은의 선의를 믿는 대통령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대한민국 안보의 목줄을 쥔 미국을 자극하고, 우리 경제의 급소를 쥘 수 있는 일본을 무시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통보한 결기의 10분의 1이라도 김정은에게 보여야 한다. 그래야 그를 대통령으로 둔 이 땅의 국민도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다.

문 대통령과 조국 후보자는 같은 우물에 빠져 있다. ‘친일파와 보수세력이 득세해온 대한민국은 진정한 나라가 아니다. 북한과 화합해 이 땅의 주류세력을 청산하고 새 나라를 열어야 한다’는 가상현실의 우물이다. 그 우물에 빠져 대통령은 김정은과 북한의 실체를, 조국은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더구나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걸 바꾸는 순간,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세계관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조국이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자와 실세가 가상현실의 나라를 향해 치달을수록 진짜현실의 민초들은 고단해지기 십상이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가 외교와 안보의 냉엄한 현실을 제대로 못 보면 국민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7대 술탄 메흐메드 2세. 이후에도 서방 기독교세계 정복사업을 펼친 그는 잔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곤 정복지의 지배층을 모조리 살해하기도 했다. 이를 전해들은 다른 곳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전을 펼치자 ‘항복하면 알라께 맹세코 목을 베지 않겠다’고 약속해 문을 열게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는 신에 대한 맹세를 지켰다. 목이 아닌 몸통을 베어 수비군 전원을 살해했다. 역사는 잔인했던 메흐메드 2세를 정복자로, 공포심에 눌려 그의 약속을 믿고 무장해제를 결정한 사람은 무능한 지도자로 기억한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문재인 정부#조국#지소미아 파기#북한 미사일 도발#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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