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태극전사들이여, 기죽지 말고, 냉정해져라”

입력 2018-06-1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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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당시 응원하던 시민들의 모습.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열릴 때면 으레 슬로건이 등장한다. 간결한 문구로 전하는 메시지다. 가슴 뭉클했던 슬로건 중 하나는 ‘위대한 도전’이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야구대표팀 김인식 감독이 던진 화두였다. 베네수엘라와 4강전을 앞둔 김 감독은 “우리가 전력이 약하지만 위대한 도전을 해보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찡하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힘들었던 우리 사회는 이 짧지만 묵직한 한마디에 큰 힘을 얻었다. 평소에도 “국가가 없으면 야구도 없다”며 태극마크의 무게감을 설파했던 김 감독이었기에 그 울림이 컸다.


또 기억나는 슬로건은 ‘새로운 도전’과 ‘유쾌한 도전’이다. 출처는 축구국가대표팀이다.


변방의 한국축구를 책임진 거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반도의 여름을 뜨겁게 달궜다. 조별 예선을 통과하고 16강에 오른 뒤에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말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16강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겠다는, 이 기똥찬 한마디에 선수들은 힘을 냈다. 그 덕분에 우리 국민들의 어깨는 으쓱했다.


2010년 월드컵은 유쾌한 도전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었다. 허정무 감독이 선수로 뛰던 1980년대와 코치로 출전한 1990년대에는 세계 수준에 한참 못 미쳐 촌놈 소리를 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더 이상 기죽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4강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어느 누구와도 유쾌하게 맞붙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이제 신태용호 차례다. 2018 러시아월드컵 F조의 한국은 스웨덴(18일), 멕시코(24일), 독일(27일)과 차례로 맞붙는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이다.


본선의 문턱에 서기까지 우리 대표팀의 지난 1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대표팀에서 경질된 날은 정확히 1년 전인 2017년 6월 15일이다. 카타르전 패배로 33개월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후임으로 등장한 인물이 신태용 감독이다. 최종예선 2경기를 남겨둔 가운데 본선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신 감독의 취임 일성은 “9회 연속 본선 진출”이었다. 살얼음판을 걸으면서도 임무를 완수했다. 축하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본선 진출을 당했다’는 조롱이 판을 쳤다. 히딩크의 감독 부임설로 곤욕도 치렀다. 경기력 논란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본선 조 추첨에서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서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평가전 결과가 발목을 잡았다. 5월 소집을 앞두고는 주요 선수들이 줄 부상을 당했다. 6월초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에서는 트릭 발언과 파워프로그램 논란, 게다가 불화설까지 터져 나왔다. ‘3패 월드컵’, ‘무관심 월드컵’이라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돌아보면 두 발 뻗고 잔 날이 며칠 되지 않는다. 이처럼 굴곡이 심했던 대표팀은 없었다. 선수들의 마음에도 생채기가 남았을 것이다.


이제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훌훌 털어버리자. 그리고 태극전사의 저력을 보여주자. 이번 대회의 슬로건은 ‘통쾌한 반란’이다. 반란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반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최선을 다하는 모습, 90분 동안 모든 걸 쏟아 붓는 투혼을 보여주면 된다. 그게 우리 팬들이 바라는 모습이다. 따라서 선수들은 정신무장부터 단단히 해야한다.


기죽지 말자. 우리는 당당하게 본선 티켓을 갖고 출전한 팀이다. 우리는 월드컵을 개최했고, 4강도, 16강도 경험했다. 9회 연속으로 본선무대도 밟았다. 유럽무대를 경험한 선수들도 많다. 더 이상 축구 변방이 아니다. 기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냉정해지자. 월드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무대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잘 될 때도,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희비가 공존한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최종 휘슬이 울릴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


서로가 보듬자. 축구는 팀플레이다. 스타 한명이 주도하는 경기가 아니다. 동료를 믿어야만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책임을 전가하는 순간, 팀워크는 무너진다. 서로 격려하고 마지막까지 믿어야한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체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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