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배구하는 아이들의 웃음에서 인생의 길을 찾은 하경민

입력 2019-02-21 08: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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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민. 사진제공ㅣ현대캐피탈

삼성화재에서 은퇴한지 2년째. 배구를 떠나면서 “이제는 배구를 하는 사람에서 배구를 보는 사람으로 지내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다시 배구하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하경민(37)은 지난해 8월부터 현대캐피탈 유소년클럽의 지도자로 배구계에 복귀했다. 은퇴 뒤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모색하던 차에 현대캐피탈 김성우 국장으로부터 “유소년클럽을 한 번 지도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은 것이 계기였다. 코트보다 힘든 세상을 경험하다보니 그래도 잘 아는 배구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도전했다.

하경민은 현대캐피탈을 비롯해 우리카드 한국전력 유소년클럽 배구교실을 진행하는 스포티즌에 강사로 합류해 주말마다 아이들을 지도한다. 현대캐피탈은 매주 일요일 천안에서 유소년 배구교실을 연다.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5개 팀이 운영된다. 수업시간은 80분이다. 하경민은 감독 겸 보조강사로 일한다. 유소년클럽이지만 80분 배구수업하고 10분 쉬고 다시 80분 동안 배구지도를 반복하기는 쉽지 않다. 현역시절 훈련보다 더 힘들 때도 있다. 지쳐서 주저앉기도 했다. 주의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을 집중시켜서 배구를 가르친다는 것이 상상외로 쉽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몸으로 하면 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면서 배구를 하다보니 많은 것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 하경민이 유소년클럽 지도자를 선택한 이유

아이들과 지내다보니 보람도 컸다. 처음 배구교실에 참가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쑥스러워하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차츰 배구를 하면서 성격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개구쟁이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웃으면서 배구를 하고 있었다. 직접 자신이 해서 성공하면 그 성취도와 기쁨이 무엇보다 높아지는 운동의 효과가 차츰 아이들에게 퍼져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엘리트스포츠는 기술이 먼저지만 유소년클럽은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이 먼저다. 현대캐피탈의 유소년 배구교실은 배구를 통해 아이들이 더 밝아지게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둔다. 처음 공이 날아오면 피하기 바빴던 아이들이 지금은 공을 보면 달려드는 모습에서 하경민은 만족하며 재미를 느낀다.

최근 6학년 아이들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벌어졌던 KOVO배 유소년클럽대회에 참가했다.

아이들의 첫 번째 공식대회였다. 아이들은 월등한 기량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상대 팀을 압도하는 실력에 보람을 느꼈다. 누구를 정식으로 가르쳐본 것도 처음이고 지도자로서 경기를 지휘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우승까지 해서 더욱 아이들이 고마웠다. 프로 선수들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프로 선수들이 뛰는 코트에서 경기를 했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으로 믿는다.

그는 매주 수업계획을 짜서 배구교실을 진행한다. 모든 기술을 다 가르치지만 아이들이 실증내지 않도록 2주 단위로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만든다. 쉽지 않은 일이다. 덕분에 많은 자료도 찾아본다. 운동은 반복훈련이 생명이다. 필요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이들에게 흥미도 줘야 하기에 다양한 시도를 한다.

현대캐피탈 유소년클럽의 프로그램이 제대로 자리 잡으면 다른 유소년클럽은 물론이고 전국의 모든 아이들이 따라서 할 수 있기에 중요한 일이다. 하경민은 이것이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강사들끼리 많은 대화도 하고 서로의 의견을 참조해 수업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


● 아이들을 보면서 새삼 배구의 즐거움을 배우다

2년 전 현역선수생활을 끝나고 쉬었다. 심장과 발목 등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했으면 배구에는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대책 없는 남편을 아내는 선뜻 이해해줬다. 가족과 함께 귀중한 시간도 보냈다. 운동할 때 휴가로 가는 여행과 은퇴 뒤에 하는 가족여행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제 아침에 일찍 안 일어나도 된다는 생각과 더 이상 힘들게 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뻤다”고 털어놓았다.

기쁜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힘든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생활 20년 동안 벌어놓은 돈은 많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미래를 생각해봤다. 여기저기 다니다보면 엘리트 팀의 지도자는 될 수도 있겠지만 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출발도 늦었다. 지도자가 된다고 해도 오래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만일에 프로 팀의 감독이 됐다고 하더라도 성적이 좋지 못하면 고작해야 2년이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쉽게 답이 보이지 않았다.

레드오션에서 나보다 앞선 사람들과 힘들게 경쟁하기 보다는 다른 곳에서 친숙한 배구를 가지고 남보다 먼저 미래를 개척해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따져봤을 때 유소년클럽 지도자는 희망이 보였다.

그래서 선택했던 새로운 일은 선물처럼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을 하나 줬다.

“아이들이 배구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구가 저렇게 즐거웠던 운동인지 새삼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일요일 오전 첫 수업을 위해서 늦잠도 포기하고 나오는 아이들은 수업도 하기 전에 공을 가지고 즐겁게 놀았다. 수업시간 내내 밝은 표정으로 운동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저 아이들처럼 즐겁게 배구를 했나”를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힘들게 운동했던 자신을 떠올려보면서 “재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운동은 그 무엇보다 즐거워야 하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배구의 즐거움을 아이들을 통해 새삼 확인했다. 그래서 더욱 이 일이 자신의 미래라고 믿는다.

● 하경민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배구

어릴 때 TV로 봤던 배구경기가 참으로 멋져 보였다. 당시 학교에서 적어내는 장래희망에 ‘배구선수’라고 적었다. 선수로서 출발은 늦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시작했다. 순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하경민은 주위의 권유로 막 창단한 벌교상고의 예비선수가 됐다. 아버지와 가까운 분이 “경민이를 배구선수로 시켜보세요”라고 권유한 것이 결정타였다.

공부가 싫던 차에 내심 좋다고 해서 들어선 운동선수의 길. 중학교 3학년 때 오전수업만 듣고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벌교상고로 가서 선배들의 훈련을 도와줬다. 기초가 없었기에 보조선수로 시작했다. 1년 선배가 윤봉우였다. 또래보다 컸던 키는 배구를 하면서 더 커졌다. 출발은 늦었지만 2학년 때부터 경기에 출전했다. 3년간 열심히 한 결과 명지대학에 스카우트 됐고 졸업하면서 막 출범을 앞둔 V리그의 첫 번째 신인드래프트 선수로 지명도 받았다.

이경수가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LG와 자유계약을 고집하는 바람에 전체 1,2번 지명권을 대한항공에 줬던 때였다. 하경민은 2라운드 3순위로 현대캐피탈의 지명을 받았다. 당시 현대캐피탈은 방신봉 신경수 이선규 윤봉우 등 국가대표 미들블로커 4명을 보유한 팀이었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 V리그 출범 첫 번째 신인드래프트로 프로선수가 되다

하경민은 김호철 감독의 지명을 받는 순간 “왜 나를 지명했지”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4명의 국가대표 미들블로커가 있는 팀에서 추가로 자신을 뽑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신인드래프트 이틀 뒤 V리그가 시작됐다.

팀과 함께 따라다닌 하경민은 훈련 기회조차 없었다. 4명 선배들이 두 팀으로 연습을 하면 뒤에서 공을 줍는 것이 전부였다. 뒤에서 지켜보니 프로팀의 배구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같은 배구였지만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러다가 1년 만에 선수생활이 끝나겠구나”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현대캐피탈은 방신봉을 트레이드하면서 하경민에게 훈련기회를 줬다. 걱정과는 달리 1년 만에 잘리지도 않았다. 차츰 출장기회가 늘었다. 보통 배구선수들은 겨울 프로시즌에 많이 뛰고 여름 국제대회 기간에 쉬는 것이 일상이지만 하경민은 반대였다. 소속팀에서는 뛸 기회가 많지 않았어도 대표팀에 가면 펄펄 날아다녔다. 유일하게 여름에 배구하는 선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 FA자격을 얻었다. 하경민은 다른 팀에서 자신의 기량을 평가받고 싶었지만 팀이 잡았다. 간곡했다. 남았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2010년 6월 현대캐피탈은 한국전력의 지명을 거부하는 문성민을 데려오기 위해 2-1 트레이드를 했다. 하경민은 임시형과 함께 한국전력으로 옮겨갔다. 상상도 못했다. 선수로서는 받아들여야 했다.


● 대한항공 한국전력 삼성화재 시절과 2차례 수술

2012~2013시즌을 앞두고 대한항공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1년간 다른 팀에서 뛰는 임대선수 신분이었다. 한 번 이적하다보니 팀을 옮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신만 새로운 팀에 적응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대한항공에서의 1년은 기분 좋게 갔다가 기분 좋게 돌아온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한국전력은 그 시즌에 2승 밖에 하지 못했는데 대한항공은 챔피언결정전까지 갔다. 한국전력으로 돌아온 하경민은 또 한번의 FA계약을 맺었다.

2014~2015시즌 신영철 감독과 함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OK저축은행에게 져서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좌절된 뒤 휴가를 받았다. 휴가 사흘 째,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인명재천이라는 말의 뜻을 그때 알았다. 정말 운 좋게도 하경민은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아는 전문 의사를 만났고 즉석에서 수술까지 받았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몰랐던 1분 1초를 다투는 위급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경민은 수술 이후의 인생은 덤이라고 믿는다. ‘만일 팀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거나 먼 곳으로 휴가를 떠났더라면’하고 생각하면 더욱 오늘에 감사한다.

말판증후근으로 알려진 그 병으로 2015년 3월 하경민은 한국전력과의 인연을 끝냈다. 다행히 수술로 몸을 회복한 그를 탐내는 팀은 여럿이었다.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던 대한항공 김종민 감독과의 의리를 지켰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즌을 준비하던 차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또 한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 바람에 대한항공과의 인연은 끝났다.

2016~2017시즌 삼성화재에서 또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는 훈련 도중 심장이 아닌 발목의 인대가 모두 끊어지는 부상이 발견됐다. 결국 “이제 선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늘고 길게 하는 선수생활을 꿈꿨던 하경민은 결국 20년의 현역 선수생활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많이 벌지도 못했다. 한창 때는 쓰기에 바빴다. 물론 후회는 없다. 하필이면 “이제부터 미래를 생각해서 돈을 모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차에 몸에 이상이 생겼다. 유니폼을 벗고 나자 남은 것은 가장의 책임뿐이었다. 아내와 2명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뭔가를 해야 했다. 다행히 오랫동안 해왔고 그나마 다른 것보다는 익숙한 배구가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연어처럼 아이들과 함께 다시 돌아온 코트에서 하경민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꿈꾼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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