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인터뷰] 이준삼(Joonsam), 뉴욕의 풀타임 로컬 재즈뮤지션

입력 2017-05-09 1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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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삼, photo credit 안웅철

재즈는 마성의 음악이다.

경제적인 가치가 우선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즈는 상대적으로 ‘배고픈 음악’이지만, 가슴 뛰는 그루브와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자유분방함은 수많은 음악학도들을 재즈의 길로 이끌고 또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재즈베이스 연주자 이준삼 씨도 이런 재즈의 마성에 빠져든 음악가이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처음 베이스를 접한 것을 계기로 재즈를 접했고, 이후 미국 배낭여행 중 뉴욕에서 목격한 재즈공연 이후로는 완전히 재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급기야 그는 무작정 미국행을 결심하고, 뉴욕에서 로컬뮤지션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준삼 씨의 로컬 뮤지션 삶은 자그마치 10년이나 이어졌다. 날고 긴다는 재즈뮤지션이 모두 모이는 ‘재즈의 메카’ 뉴욕에서 10년간 재즈 뮤지션으로 살아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이준삼 씨의 실력을 입증하는 보증서이자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훈장이다.

여기에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경력을 추가하자면, 재즈의 메카인 뉴욕에서도 가장 유명한 재즈클럽인 블루노트 재즈클럽과 스몰스 재즈클럽에서 모두 공연을 한 한국인 재즈 베이시스트는 이준삼 씨가 유일하다.

이처럼 뉴욕에서 인정받는 재즈 뮤지션으로 지내온 이준삼 씨는 돌연 미국에서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사실상 완전히 무명이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동아닷컴과 만난 이준삼 씨는 자신의 미국행부터 시작해 한국으로 돌아온 계기,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의 계획을 찬찬히 들려주었다.

이준삼 씨가 미국행을 결심한 건 충동적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뉴욕에서 재즈공연을 보고 거기에 흠뻑 빠졌고, 이후 그는 곧바로 미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준비했다.

이준삼 씨는 “처음에는 동아리에서 베이스를 시작했고, 그 다음에 재즈 음악을 접하게 됐다. 마침 좋은 기회가 있어 미국에 배낭여행을 갔는데, 그때 내 머리에는 ‘미국 재즈 음악을 보겠다’ 딱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실제로 뉴욕에서 재즈 공연을 봤는데, 그게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저거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2006년 대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미국 대학에 원서를 냈다. 그때 부모님에게 얘기도 안했었다. 하하. 그런데 버클리 음악학교, 뉴스쿨, N.Y.U.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래서 (미국에)갔다”라고 미국에 간 계기를 밝혔다.

세 군데 학교 중 이준삼 씨가 선택한 학교는 N.Y.U. 였다. 일단 재즈의 메카로 불리는 뉴욕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뉴욕에서의 생활은 예상대로 힘들었다. 쉴 새 없이 연주하고 연주해도 겨우 먹고 살 정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준삼 씨는 “상당히 유명한 재즈뮤지션도 뉴욕에서 많이 사는데, 그 사람들도 어렵게 산다. 굉장히 드문 케이스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사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집안이 부유한 사람이다”라며 “나는 할렘가에서 살았다. 이벤트나 호텔, 클럽에서도 연주를 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연주를 할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레스토랑은)연주를 하면 밥을 따로 주고 팁도 꽤 준다”라고 10년간 힘든 생활을 이어왔다고 털어놓았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이준삼 씨는 열정을 잃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초반에는 열정이 너무 넘쳐서 문제였을 정도였다.

이준삼 씨는“처음 미국에 갔을 때 열정이 너무 많았다. 별의 별짓을 다했다.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하는 잼 세션을 일주일에 5번씩 하고 그랬다. 가서 연주하면서 배우기도 하고 그랬다. 나를 알리고 어필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했다.

또 재즈와 국악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 그는 “처음에는 나도 미국 재즈가 좋아서 미국에 갔고, 또 이걸로 유명한 흑인이나 백인 뮤지션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하면 내가 미국 재즈씬에서 내 음악을 소개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이덴티티 문제더라. 이미 미국 재즈는 만들어진 그림이 있다. 그 안에서 아시아인 남성인 내가 아이덴티티를 찾는 건 다른 문제더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몸 안에 있는 국악을 찾게 되더라”라고 말하며, 단순히 기술을 연마하기보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준삼 씨의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점점 유명한 재즈 클럽에서 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준삼 씨는 “미국에서는 로컬 뮤지션으로 살았다고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뉴욕은 재즈의 메카라고 불리는 곳이다 경쟁도 심하고 유명 뮤지션도 많다. 가장 치열하고, 또 스스로를 검증받고 싶어 하는 곳인데 로컬 뮤지션으로 삶을 영위했다는 게 나는 자랑스럽다. 나는 인정받는 연주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를 많이 했고, 로컬 뮤지션으로 살 수 있었다.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그래서 ‘풀타임 로컬뮤지션’ 이 말이 좋다”라고 뉴욕에서도 인정받는 연주자였음을 알렸다.

10년간 숱하게 이어온 연주 중에서도 블루노트 재즈클럽과 스몰스 재즈클럽의 무대에 선 건 어디에서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큰 자산이다.

실제 이준삼 씨는 “뉴욕에서 여기서는 꼭 연주 해야지 하는 데가 블루노트 재즈클럽과 스몰스 재즈클럽이었다. 여기서 공연하는 게 (미국에 온)목표였다. 그 두 곳에서 2016년에 연주를 했다. 한국인 베이시스트 중에 이 두 곳에서 모두 연주를 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라고 자부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토록 바라던 공연이었지만, 블루노트 재즈클럽과 스몰스 재즈클럽에서의 공연이 뉴욕을 떠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준삼 씨는 “그것을 이루면서 (뉴욕에)미련이 없어졌나 싶지 않다”라고 목표 달성 후 공허함을 털어놓았다.

게다가 10년이라는 세월은 조금씩 그를 무디게 만들고 있었고, 블루노트 재즈클럽과 스몰스 재즈클럽의 공연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표출이 되고 말았다.

이준삼 씨는 “처음에는 현지 클럽에서 열정적으로 했는데 7~8년 정도 지나니 잼 세션도 안가고 있더라. 안가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표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고, 이방인의 외로움이 계속 쌓여왔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이준삼 씨가 한국에 돌아오게 된 계기는 미국으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었다.

이준삼 씨는 “아는 후배가 한국에 가면서 요즘 비행기 값이 싸다고 해서 티켓을 보다가 즉흥적으로 사버렸다. 티켓이 2주 반 뒤에 떠나는 비행기였고, 그 2주 반 만에 악기 팔고 일하던 거 다 정리를 해버렸다. 그런데 그 2주 반이 기뻤다. 왜 기뻤나 생각해보니 그동안 힘들었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거 같다. 그렇다고 미국에 있던 기간이 항상 힘들었던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새로운 음악을 하는 그런 재미가 있었다. 로컬 뮤지션으로 살아가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래도 다 참기는 힘들었던 거 같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미국으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돌아온 것도 충동적이다 보니, 국내에서 활동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10년간 이어온 뮤지션의 삶을 통해 형성한 인맥 덕분에 미국으로 막 출국했을 때보다는 상황이 좋긴 하다. 당장 5월 19일 서울 마포구 폼텍웍스홀에서 공연을 개최하는 것만 해도 미국에 막 발을 내딛었을 때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출발이다.

또 이준삼 씨는 자신의 경험과 조금 더 나아진 환경을 발판으로, 한국 사람들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재즈를 들려주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이준삼 씨는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은 연주회를 시작했다. 일단 국내에서 지난달에 발매된 ‘A DOOR’ 앨범 기념 공연을 5월 19일에 하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음악 프로젝트를 할 예정이다”라며 “1집을 국내에 소개하고 싶기도 하고 미국에서 10년간 살면서 가져온 음악이야기를 알리고 싶다. 또 1집은 해외 뮤지션들과 작업했는데, 2집은 국내 뮤지션과 작업하고 싶다. 2집은 한국에서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보고 싶다”라고 한국에서의 활동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가고 있음을 알렸다.

또 이준삼 씨의 한국에서의 음악활동은 꼭 ‘재즈’라는 글자에 얽매이지 않을 전망이다.

이준삼 씨는 “재즈 뮤지션이라고 하면 ‘재즈’라는 말을 꺼냈을 때 이미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려워한다. 그런 이미지를 지우고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다”며 “그렇다고 굳이 내가 알고 있는 재즈를 사람들에게 ‘이게 좋아’라고 들으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재즈’라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다양한 음악을 하고 싶다. 어차피 나는 재즈가 가장 활발하게 모이는 뉴욕에서 10년간 재즈만 하면서 밥을 먹고 살았다. 그러다보니까 본 바탕은 재즈다. 내가 뭘 해도 어떻게든지 재즈적인 요소가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이제 한국에서 자신만의 재즈를 이어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더불어 그는 “미국에서 배운 게 테크닉도 있지만, 사람을 대하는 걸 배운 거 같다. 대화를 하는 거도 어떤 면에서는 합주고, 앙상블이고, 하모니다. 미국에서 그걸 배운 거 같다. 악기를 통해서 대화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한국에서도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하모니를 만들어가고 싶다. 또 그럴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라고, 이제 고국 한국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기원했다.

동아닷컴 최현정 기자 gagnra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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