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가 뮤지컬로 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카이는 처음부터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머뭇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톱’으로서 경험이 미약하다고 스스로 판단했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제작기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카이는 열심히 무대에 오르며 점점 성장해갔다. 그러던 중 ‘벤허’의 개막 이야기가 업계 사이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카이와 ‘벤허’의 인연은 시작됐다.
“’벤허’가 미뤄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더 열심히 해서 꼭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왕용범 연출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처음에는 ‘메셀라’ 역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조금 더 욕심을 냈어요. 단순히 타이틀롤이라 그런 건 아니었어요. ‘벤허’는 제게 특별한 작품이었거든요. 왕 연출가께 ‘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돼 있다’라고 말씀 드렸고 연출가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죠. 작품의 성패를 떠나 의미가 깊습니다.”
답변을 하면서, 카이는 두 눈을 반짝였다. 단순히 역할 욕심이 아닌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그에게 있는 듯 했다. 그에게 ‘벤허’는 왜 남다른 걸까. 그러자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 속마음을 속 시원히 꺼냈다.
“어렸을 때 ‘벤허’를 보면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물론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서사적이고 비극적 운명은 아니지만 저도 어린 시절부터 롤러코스터와 같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았거든요. 집안 사정도 그렇고, 제가 꿈을 키우는 과정에서도 참 힘들었어요. 그래서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지만 신을 원망했던 적도 참 많아요. 그래서 기도를 하며 절망과 배신감을 들 때가 참 많았어요. 그래서 ‘유다 벤허’의 모습을 보며 참 공감이 되더라고요. 또 저는 왜 무대에 서는지 자문할 때가 있어요. 제가 내린 결론은 삶의 관점이 나만이 아닌 다른 곳일 때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무대’도 그 중에 하나고요. ‘벤허’가 그런 마음을 더 일깨워주는 것 같아요.”
그토록 원했던 작품과 만나서 기뻤지만 만드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고. 왕 연출가의 “마음껏 마음을 표현하라”는 말에 저돌적인 모습과 함께 벤허의 마음에 가까워지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돌이켜보면 평소보다 나를 더 채찍질하며 캐릭터를 만들었다”라고 회상했다.
“낮아진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구현하고자 하는 목표의식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연습 기간에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고 운동을 했어요. 점심, 저녁에는 식사를 하지 않고 극장 내 피트니트 센터에 가서 운동을 했고요. 연습을 마치고 따로 노래와 연기 연습을 했죠. 그렇게 집에 돌아와도 작품 생각에 잠도 잘 못 잤어요.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보낸 것 같아요.”
1880년 출간된 루 윌리스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벤허’는 대중에게는 195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 연출, 찰턴 헤스턴 주연의 동명 영화로 더 알려졌다. 로마 제국 시대, 유대 청년 벤허의 시련을 통해 신의 섭리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스크린으로 옮겨지며 초호화 액션 스펙터클 대작이 되면서 화려한 볼거리가 제공된다. 그 중에서 벤허와 메셀라의 전차 대결 장면은 여전히 회자되는 명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뮤지컬 ‘벤허’에서도 전차 대결 장면을 볼 수 있다. 여덟 마리의 구체 관절 말 모형과 원형 스크린 등으로 무대 위에 명민하게 표현했다. 어찌 보면 관객들은 과거에 봤던 ‘벤허’의 명장면을 기대하고 올 수 있지만 분량은 크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 카이는 “’벤허’는 인간 ‘유다 벤허’의 삶을 초점에 두고 그렸고, 그로 인해 더 큰 미래가 제시되는 작품”이라며 “부족할 게 없었던 벤허의 삶에 닥쳐온 시련과 또 그가 하고자 했던 복수, 그리고 끝내 얻게 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한 부분이기에 거기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을 통해 가장 크게 전달하고자 하는 건 ‘용서’가 아닐까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예수가 벤허에게 ‘용서하라’는 말을 하잖아요. 복수를 꿈꾸던 벤허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요즘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화가 나 있는 것 같아요. 뉴스를 봐도 그런 사건들이 너무 많고요. 작은 일에도 큰 다툼이 일어나는 세상 같아요. 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용서’라는 것을 삶으로 옮기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 작품을 통해 큰 가르침을 받은 것 같아요.”
2011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로 뮤지컬에 발을 디딘 카이는 어느덧 타이틀롤도 거머쥘 만큼 성장했다.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뮤지컬을 시작한 이후 단 하루도 헛되이 살아본 적이 없었다고 장담할 만큼 그는 완벽한 무대를 꾸미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이 시간이 더 빨리 온 것 같아요. 그래서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크지만 부족한 부분이 아직 느껴지기 때문에 이 순간을 누리기보다는 더 발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스스로 칭찬도 해주고 싶어요.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웃음)”
그러면서 카이는 “앞으로 내 인생의 다음 장이 어떻게 펼쳐질지”라며 기대감을 더했다. 그는 “6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뮤지컬 배우로 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작품을 하면서 행복하고 즐겁고, 또 한편으로는 지치지만 내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라며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아무도 모르지 않나. 지금은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언젠간 내려와야 하는 시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저희 매니저 팀장님은 ‘지금부터 너무 많은 생각하지 말라’고 하세요. 하하. 그러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고. 하지만 정말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럼에도 마음 속에 꼭 해야겠다는 일은 있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어려운 형편에 ‘명성황후’를 보여주신 적이 있어요. 그 때 티켓 한 장을 사시곤 저 혼자 극장으로 들여보내셨죠. 그 작품을 보고 가슴이 뛰었거든요. 지금 생가해 보면 ‘내가 그걸 안 봤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기억이 아직도 있어서 문화소외계층 아이들에게 공연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어요. 누군가 그 때의 저처럼 꿈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먼 미래를 물어봤으니 가까운 차후 계획도 물어봤다. 당분간 ‘벤허’에 집중하며 잘 마치는 것이 목표라고. 하지만 곧 앨범으로 팬들을 만날 것이라고 귀띔을 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 ‘팬텀싱어’를 보며 남다른 느낌을 받는다”라며 “후배들과 만나며 녹음을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뮤지컬 배우이기 전에 전 팝페라 가수잖아요. 그래서 ‘팬텀싱어’가 화제가 되고 클래식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이 많아져서 감회가 새로워요. 제가 데뷔 앨범을 내고 방송국을 다닐 때만 해도 틀 곳이 없다며 거절도 많이 당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후배들이 발돋움 하는 모습을 보면 감개무량해요. 후배들과 함께 저희가 하는 음악도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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