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트럭 운전수’ 한용덕, 독수리 에이스로 날다

입력 2011-11-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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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성적표에 비해 주목받지는 못 했지만 독수리 마운드를 든든하게 떠받쳤던 꾸준함의 상징이었다. 한화 한용덕 투수코치의 17년 선수인생과 오늘을 스포츠동아가 들어봤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2. 한화 한용덕 투수코치

맞는 게 싫어 대학1학년 때 야구 중단
생업 전선 뛰다 테스트 통해 빙그레 입단
우연히 깨우친 슬라이더로 프로 성공시대
17년간 뛰며 120승…원조 연습생 신화
불굴의 투혼, 이젠 제자들에 전수합니다

1991년 최다 완봉, 1993년 최다 완투 투수. 역대 최다 이닝 투구 5위(2080이닝)에 완투만 60번(완투승 41회, 완봉승 16회)을 했다. 통산 120승 118패 11홀드 24세이브에 방어율 3.54. 이 화려한 성적표의 주인공은 바로 한화 한용덕(46) 코치다. 독수리 마운드를 든든하게 떠받쳤던 꾸준함의 상징, 하지만 실력에 비해 덜 주목받았던 이글스 우완 레전드. 그의 17년 선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자랑스러울 만 했다.


● 원조 ‘연습생 신화’의 시작

동아대 1학년 때 야구를 그만뒀다. 지독한 체벌에 시달리다 스무살 청년의 무릎에 관절염이 생긴 탓이다. 짐을 싸서 고향 대전으로 내려갔다. ‘야구했던 정신력으로 뭔들 못 하겠나’ 싶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 8.5톤 트럭을 몰고 박스를 나르며 전국을 돌았고, 리어카를 끌어봤으며, 전화기도 팔아봤다. 하지만 적성에 맞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그랬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본 프로야구 경기에 피가 끓어올랐다.

“뜬금없이 찾아가 ‘야구 다시 시켜달라’고 말하기가 어렵잖아요. 용기를 내서 야구장에 갔다가 그냥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했죠. 그러다 북일고 선배였던 김병원 매니저가 절 알아보신 거예요. 고교 은사였던 빙그레 김영덕 감독님께 갔더니 ‘많이 컸네’ 하시면서 배팅볼부터 던져 보라고 하셨죠.”

김영덕 감독은 당시의 한용덕에 대해 “착하고 성실했는데 고 1때는 키가 162cm밖에 안돼 경기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키도 엄청 크고 체격도 좋아져서 왔더라”면서 “무엇보다 용덕이 배팅볼을 친 타자들이 ‘공 정말 좋다’고 칭찬했다. 이 정도면 선수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연습생으로라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김 감독은 연봉 300만원을 제의받고 다시 야구를 포기하려던 제자에게 “잔말 말고 나와 야구 하라”고 일침을 놨다. 그리고 구단에 부탁해 연봉을 600만원으로 올려줬다. 한용덕의 원조 ‘연습생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직구밖에 못 던지던 투수가 ‘슬라이더의 왕’으로

고교 때까지 내야수를 했다. 하지만 투수가 해보고 싶었다. 문제는 직구밖에 못 던진다는 것. 공 100개를 던지면 100개가 다 직구였다. 아무리 슬라이더를 연습해도 감이 안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삼성 2군과의 경산 연습경기에서 포수 유승안이 변화구 사인을 냈다. 대선배의 사인을 거절할 수 없어 눈 딱 감고 던졌다. 그게 미트가 기다리는 자리로 정확하게 날아갔다. 다시 한 번 백도어 슬라이더 사인이 왔고, 또 던졌다. 다시 정확하게 꽂혔다. 한 코치는 “그때 슬라이더를 깨우쳐서 마흔까지 먹고 살았다”며 웃었다. 물론 그냥 ‘먹고 산’ 수준은 아니었다. 김 감독은 한용덕을 “컨트롤이 좋았고 특히 슬라이더를 굉장히 잘 던지는 투수”로 기억했다.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한화 정민철 코치도 “바깥쪽 직구와 슬라이더 컨트롤이 완벽했다. 10개를 던지면 8∼9개는 원하는 곳에 들어갈 정도”라고 했다.

한 코치는 그때부터 마운드에서 공 던지는 행복을 깨달았다. 1988년 전기 리그 막바지, 처음 1군에 올라가 해태전 9회 1이닝을 던졌다. 무실점. “내가 프로 선수로 정말 마운드에 선 것인가 실감이 안 났죠.” 그리고 세 번째 경기는 해태전 선발 등판이었다. 김준환에게 2점홈런을 맞았을 뿐 팀의 3-2 승리를 이끌고 첫 승을 따냈다. 불혹을 훌쩍 넘긴 중년의 코치는 스물넷이던 그때를 떠올리며 “야구하면서 그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쑥스러워했다.


자신감을 심어준 일본인 코치의 한 마디

한화는 1989년 시즌을 마치고 장종훈 강석천을 포함한 기대주 여섯 명을 일본 다이에 호크스 마무리 훈련에 연수 보냈다. 2년 연속 2승을 올린 한용덕도 그 안에 포함됐다. 한 코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본 선수들의 엄청난 훈련을 곁에서 보면서 내가 성숙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데뷔 후 처음으로 참가한 1990년 스프링캠프는 그의 야구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사토라는 이름의 일본인 투수코치가 저를 보더니 ‘이 선수는 충분히 10승을 할 수 있는 투수’라고 칭찬했어요. 처음엔 ‘설마’ 하고 웃어 넘겼지만 두 번, 세 번 같은 얘기를 들으니 점점 ‘정말? 내가?’ 싶더라고요.” 김 감독 역시 “그때 그 말이 한용덕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증언했다.

한 코치는 사토 코치의 말대로 그해 13승을 올리며 팀의 새로운 주축 투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91년 17승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섰고, 한·일 슈퍼게임에 대표로 출전해 3패 중이던 한국에 첫 승을 안겼다. 달라진 마음과 자세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깨닫게 된 계기였다. 후배들도 덕을 봤다. 정 코치는 “1992년 입단했을 때 첫 룸메이트가 한 코치님이셨다. 첫 원정 때 어렵고 서먹서먹해서 어쩔 줄 모르던 내게 글러브를 하나 주셨는데, 그걸로 첫 해 14승을 했다”고 했다. 또 “본받을 만한 선배와 방을 쓴 게 좋은 공부가 됐다. 훈련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나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한 코치는 지도자가 된 지금도 그 일본인 코치를 떠올린다. “칭찬과 자신감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죠. 사실 훈련 때 정말 좋은 볼을 던지다가 경기에서 못 던지는 선수들이 많거든요. 자신감을 심어줘야 잠재력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왼팔 장애 감추고 마흔까지 선수 생활

한 코치가 아직도 후회하는 순간이 있다. 16승을 따내며 해태 조계현과 다승왕을 다투던 1994년, 쌍방울전에서 8회까지 0-0으로 맞서다 9회 아무 이유 없이 교체됐다. ‘팀이 나를 안 도와 준다’는 반항심에 2군행을 자청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온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아내는 죽다 살아났고, 아들은 대퇴부가 손상됐다. 스스로도 2년간 후유증을 달고 살았다. 야구보다 아내 병간호가 더 중요했으니 경기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왼팔이 아팠다. 제대로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팀에 사실대로 말하면 야구를 그만 두라고 할까봐, 멀쩡한 척 연기하며 경기에 나갔다. 그는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아직도 왼팔이 정상적이지 않다. 일종의 장애”라고 털어놨다. 그의 투구폼에 대해 남들이 ‘힘 안 들이고 슬렁슬렁 던지는 것 같다’고 평가했던 이유도 사실은 왼팔을 전혀 쓸 수 없어서였다. “왼팔 장애가 아니었다면 더 잘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아요. 투수는 전신의 힘을 다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좀 더 어른스럽고 성숙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하죠. 하지만 덕분에 이제는 선수들이 어떤 잘못을 해도 다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거친 파도처럼 출렁였던 인생사. 그 풍파는 한 코치에게 온화함과 포용력을 남겼다. 다만 작은 부상도 견디지 못하는 선수들을 보면 안타까운 게 사실이다. “남들보다 구위가 빼어나지도 않았고 팔도 아팠던 제가 ‘정신력’ 하나로 여기까지 왔잖아요. 제자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조금씩 해주면서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네가 못 하냐’고 해요. 우리 선수들은 후회 없이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제 바람이에요.”


● 한용덕은?

▲ 생년월일=1965년 6월 2일

▲ 출신교=대전 천동초∼충남중∼천안북일고∼동아대 중퇴

▲ 키·몸무게=184cm·84kg(우투우타)

▲ 경력
-
1988년 빙그레 입단
- 1994년 한화(2004년 은퇴)
- 2006년 한화 코치

▲ 통산 성적
- 120승118패11홀드24세이브
- 2080이닝(역대 5위)
- 1341탈삼진(역대 7위)
- 방어율 3.54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goodgo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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