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박경완과 테임즈의 대기록 도전 포기 유감

입력 2015-05-2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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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임즈. 스포츠동아DB

1998년 7월 28일(한국시간). 아칸소 트레블러스(세인트루이스 산하 더블A) 소속 외야수 타이론 혼은 샌안토니오 미션스전에서 ‘로또’를 맞았다. 다름 아닌 4연타석 홈런. 더욱 놀라운 것은 1회 2점, 2회 만루, 5회 1점, 7회 3점홈런을 날렸다는 사실이었다. 한 경기에 4종류의 홈런을 모두 때려낸 것은 지금까지 전 세계 야구 역사상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이클링 홈런’은 그만큼 진기록 중의 진기록. 올해로 34년째를 맞은 한국프로야구는 물론 메이저리그 147년 역사와 일본프로야구 80년 역사에도 없다.

26일 마산구장. NC 에릭 테임즈는 두산전에서 3연타석 홈런을 터뜨렸다. 2회 만루, 4회 3점, 6회 1점홈런. 혼자서 8타점을 쓸어 담아 스코어는 13-0으로 벌어졌다. 승부는 끝난 상황. 그러나 팬들이 자리를 뜨지 않아야할 까닭이 생겼고, 다른 팀 팬들조차 TV 채널을 돌려야할 이유가 만들어졌다. 과연 한국프로야구에도 첫 사이클링 홈런이 나올 수 있을까. 타이론 혼 이후 세계 야구역사에 두 번째 사이클링 홈런이 탄생할 수 있을까.

‘설마’ 하면서도 테임즈의 다음 타석에 대한 기대와 상상으로 모두가 설레기 시작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NC가 7회초 수비에서 테임즈를 빼고 1루수로 조평호를 투입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테임즈가 남긴 기록은 KBO리그 1경기 최다타점(8) 타이기록뿐. 역대 최다타점 신기록도, 역대 2번째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의 기회도 날아갔다. 무엇보다 KBO리그 최초 사이클링 홈런의 도전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말았다.

NC 김경문 감독은 다음날 테임즈를 교체한 데 대해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점수차가 커 모처럼 1군 엔트리에 포함된 백업요원 조평호에게도 출전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테임즈가 대기록을 의식한 나머지 스윙이 커져 자칫 타격 밸런스가 흐트러질 수 있다는 염려도 했다는 것. 감독으로서 소속 팀 선수가 대기록을 달성하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팀의 전체 밸런스를 고려하고 대기록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그 순간, 문득 15년 전 일이 떠올랐다. 현대 박경완은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화전에서 2회(1점), 3회(2점), 5회(1점), 6회(2점) 홈런을 때려내 KBO리그 최초의 4연타석 홈런을 작성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없는 5연타석 홈런 도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순간, 당시 현대 김재박 감독은 19-2로 크게 앞선 8회초 박경완 타석 때 장교성을 대타로 내보냈다. 자칫 박경완이 홈런을 치려고 덤벼들다 상대 투수의 공에 몸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날 현대는 20-2로 대승했다.

김재박 감독은 승부 앞에 늘 냉정했다. 박종호가 현대 시절이던 2003년 8월 15일 수원 삼성전에서 홈런, 3루타, 2루타를 차례로 쳐내 사이클링 히트에 단타 1개를 남겨둔 상황. 그리고 6-7로 뒤진 9회말 무사 2루에서 마지막 타석 기회가 돌아왔다. 관중석의 팬들이 모두 숨을 죽였지만 김재박 감독이 선택한 작전은 희생번트였다. 결국 번트에 실패한 박종호가 강공으로 전환해 타격을 했지만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면서 사이클링 히트는 무산됐다.

김재박 감독이 1경기 5연타석 홈런에 도전할 수 있는 박경완을 교체하고, 김경문 감독이 사이클링 홈런과 KBO리그 한 경기 최다타점에 도전할 수 있는 테임즈를 바꾼 데는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다. 특히 김경문 감독은 보기 드물게 테임즈에게 두 차례나 의사를 묻는 절차를 거쳤고, 테임즈 역시 ‘쿨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배려 자체가 호방하면서도 합리적인 성품을 지닌 김경문 감독이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기자는 그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3연타석 홈런과 8타점만으로도 팬들에겐 좀처럼 보기 힘든 충분한 퍼포먼스를 제공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야구는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상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투수가 공 1개를 던질 때마다, 한 타자와의 승부가 끝날 때마다, 이닝 교대 때마다 막간을 이용해 앞으로의 승부를 예측하며 손에 땀을 쥐는 것이야말로 야구만이 주는 매력이다.

이미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김빠진 승부. 거기서 팬들은 남은 이닝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 했을까. 생애 처음 찾아온(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찾아오지 않을지 모르는) 행운의 기회 앞에서, 다시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뛰는 순간,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가던 주인공이 느닷없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말았다. 그러면서 먼 훗날 스코어도 기억나지 않을 수많은 1승과 1패 중의 한 경기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물론 사이클링 홈런은 혼자 힘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점 홈런을 남겨뒀기에, 그의 타석에 앞서 무조건 주자가 1명 출루해 있어야 하는 조건부터 성립돼야 한다. 결과적으로 그날의 경기 구성상 테임즈는 교체되지 않았더라도 8회말 선두타자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혹 사이클링 홈런의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기록 달성에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과 도전을 지켜보는 것도 팬들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에서 선수의 기록 도전에 함께 호흡하고, 감동하고, 아쉬워하고, 탄식하는 것. 그 또한 야구팬만이 누릴 수 있는 맛과 멋이다.

김경문 감독은 팬들을 향해 늘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를 할 만큼 누구보다 팬을 먼저 생각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한마디와 결정은 야구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무게감 있는 사령탑이 됐다. 그런 그이기에 그런 결정은 지금도 아쉬운 게 사실이다.

선수단 전체를 관장해야 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감독들의 자세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대기록 도전의 후유증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바람에, 감독들 사이에 대기록 도전이 쓸모없는 일로 자리잡을까봐 걱정된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팬들에겐 앞으로 대기록 달성과 그 도전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기회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걱정할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생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잠정적 위험을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긍정적 가능성과 도전의 기회마저 봉쇄한다면 역사의 진전은 없다. 당장의 승부도 중요하지만, 감독들이 팬들과 함께 호흡하는 여유도 가졌으면 좋겠다. 김경문 감독뿐만 아니라 모든 감독들에게 드리는 부탁이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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