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푸른 노을의 마을, 봉화

입력 2015-08-20 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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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투어 제공

하늘 아래 푸른 노을의 마을, 봉화

태백산맥 줄기가 급격하게 뻗쳐 내려오다 서남쪽으로 길을 틀고는 잠시 숨을 고른다. 산맥의 호흡은 가쁘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쉼표를 남기고 다시 먼 길을 떠난다. 산맥이 떠나고 난 자리엔 산의 자락이 깊게 드리워진다. 산은 기슭과 숲을 앞세우고 자신은 조용히 그들 뒤로 물러난다. 그곳에 봉화가 남는다.

흔히 강원남도라고 불리며 한반도 남쪽 최고의 오지로 꼽히는 봉화. 조선시대만 해도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될 정도로 최상급 은어가 잡히던 곳인 봉화는 세계 최남단의 열목어 서식지를 보유할 정도로 맑고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전체 면적의 80퍼센트가 넘는 지역이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 이루어져 있고 귀농인구가 천 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역 인심도 좋다. 때문인지 큰 걱정거리가 없는 봉화에는 유독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금 들여다보면 봉화에는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수많은 격조 높은 고택들과 각화사와 청량사 그리고 축서사 같은 유려한 사찰들. 마지막으로 백두대간협곡을 달리는 열차까지. 봉화는 이제 오지라는 수식어를 내려놓고 좀 더 바깥쪽으로 나올 모양이다. 시끌벅적했던 여름의 막바지, 봉화라면 당신의 마지막 여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아직은 충분히 오지니 말이다.

조선의 로맨시스트 이몽룡의 생가, 계서당
4대 국문소설 중 하나이자 최고의 로맨스 소설로 알려진 춘향전. 소설은 허구에 기반하지만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 이몽룡의 실제 이름은 성이성. 실제가 소설로 바뀌면서 성씨인 성을 춘향에게 주었다. 봉화 물야면에 있는 계서당은 이몽룡의 생가로 현재까지 성이성의 13대 손이 살고 있다. 봉화에서 영주 부석사로 넘어가는 길에서 응봉산 쪽으로 들어오면 아담한 사과밭 뒤편에 계서당이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사랑채 계서당이 눈에 들어온다. 한줄기 바람이 휘이 지나가듯 사뿐히 치켜든 지붕 끝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파르지 않은 마음처럼 미려하게 날아가고 있다. 왼편으로 사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는데 내부의 ‘ㅁ'자 구조는 경상북도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형식이라 한다. 종부 어르신은 낯선 이의 예고 없는 방문에 매실차를 한 잔 내주며 자리를 권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약하지 않은 방문객들이 찾아오지만 종부의 얼굴에는 저어함이란 없이 대대로 가문을 지켜오고 있다는 종가의 자부심마저 엿보인다. 어제 들여온 새끼 고양이가 밤새 어미를 찾는지 울었다며 종부 어르신은 생선을 갈아 고양이에게 내주었다. 대청마루에는 '정중동靜中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움직이되, 조용함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소설과 달리 이몽룡과 춘향의 사랑은 실제로 혼인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사랑의 결과가 어찌 꼭 결혼으로 마무리가 돼야할까 마는 어찌되었건 그들은 분명히 순정했고 사랑했다. 어르신께 기별을 하고 오른쪽 사당 언덕에 있는 소나무를 보러갔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500년이나 된 것으로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성이성의 조부가 제주도에서부터 가져온 것으로 실제로 이 소나무 한그루는 주변의 소나무들과 완전히 다른 종이라고 한다. 성이성은 4차례의 암행어사 파견 등 두루 관직을 거친 후 70세에 외가가 있는 바로 옆 동네 영주시에 묻혔다.

TIP
입장료는 따로 없지만 엄밀히 말해서 계서당은 아직까지 살림을 살고 있는 일반 가정집이다. 예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통과 사명감이 만나는 곳, 신흥 유기마을
시내랄 것도 없는 작은 봉화 시내에서 유기마을까지는 2킬로미터 남짓으로 걸어갈 만한 거리다. 태백산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산바람과 들꽃이 피어있는 한적한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이곳 산으로 둘러싸인 봉화에 온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봉화에서 유기를 생산해 낸 것은 500년도 더 된 이야기로 유기마을은 현재 삼계리로 불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유기로 새롭게 흥한다하여 신흥리新興里로 불렸다. 요사이 유명해진 안성유기도 봉화에서 이어져 나간 한 지류이며 전국의 유기 장인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줄 정도로 봉화 유기의 명성과 위세는 대단했다. 한때 70여 가구 중에서 40여 가구가 유기를 제작하고 나머지는 관련 품을 팔았을 정도로 유기 특구였지만 현재는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의 무차별 공격에 그만 놋그릇의 그 뭉근하고 투박한 멋을 조금 내려놓았다. 우리나라 유기제품의 70%를 책임질 정도로 번창했던 유기마을은 현재는 두 곳만이 유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유기 장인이었던 선친을 따라 2대 고해룡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3대 놋갓장이 가문인 봉화유기는 아직도 모든 작업을 억척스럽게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명감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 인원과 자본이 부족하기에 주문생산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아쉽다.
안주인의 허락으로 뒤편 공방에 들어간 시간은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더운 여름임에도 선풍기 하나만을 의지한 채 놋그릇을 깎고 다듬는 모습은 실로 감동 그 자체였다. 유기의 광택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빛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주위가 밝으면 안 되기에 어둠 속에서 그리고 더위 속에서 벌이는 그의 작업은 분명, 사투에 가까웠다. 쇳물을 끓이던 구석의 큼지막한 화덕에는 아직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교대 작업이 끝난 시간은 새벽 여섯 시라고 했다. 그 뭉근하게 전달되어 오는 열기에는 유기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는 것과 같았고 그 현장은 묵묵하게 잡아주고 은근하게 전달하는 유기라는 이름 그 자체였다. 빨리 데워지고 빨리 식는 요즘의 모든 일상들. 유기는 분명히 우리에게 한국의 멋스러움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투박하지만 은근한 한국의 멋, 바로 그것이었다.
http://www.yougijang.com/

석천계곡과 석천정사
삼계리에서 나와 길을 건너 조금만 걸으면 석천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봉화 시내에서 차를 이용하면 반대편의 닭실마을을 둘러 계곡 바로 앞까지 차를 타고 올 수 있다지만 이곳까지 와서 차를 타고 다닐 이유가 전혀 없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주변에는 독특한 색감과 모양새의 삼계서원이 있다. 봉화 출신인 조선 중종 때의 명신, 충재 권벌權橃1474~154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고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은 내부로 들어갈 수 없이 굳게 닫혀있었다. 무분별한 관람으로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니 오히려 반갑고 고마웠다. 계곡물을 따라 걸었다. 하늘은 야트막하게 비를 흩뿌려 운치를 더했다. 아낙들은 물에서 청정지역에서만 산다는 다슬기를 잡고 있었다. 흙냄새와 솔 향이 뒤섞인 조붓한 계곡을 따라 이 십 여분. 갑자기 한 눈에 가득 들어온 것은 석천정사石泉精舍였다. 충재선생이 평안북도 삭주로 유배를 가자 충격을 받은 큰아들 권동보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에 석천정사를 지었다. 루樓나 당堂이 아닌 정사라고 함은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궁벽한 봉화, 게다가 산간의 숲을 지나 개울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숨어버린 석천정사는 시류를 떼어놓고 보자면 하나의 작은 세계처럼도 보였다. 너럭바위 위로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청아한 옥빛과 맑은 노란빛의 석천정사 뒤로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하게 우거져있다. 석천정사는 그 사이에 포옥하고 안긴 모습이었다. 이것은 마치 자연과 조화로움을 극대화시킨 자그마한 정원과도 같았다. 일본 정원의 전개가 의도적인, 얼핏 숨 막힐 정도로 극밀하게 정원을 꾸몄다면 한국의 정원은 역시 자연과 벗함이었다. 흘러가고 스며들며 결국, 그대로 그 속에 자신의 몸을 내 맡기는 것. 그것이 진정 한국의 아름다움이었다. 가을, 단풍이 들어 나무들을 붉은 색과 황금의 색으로 치장할 때, 나는 그 장면을 석천정사의 그림 위에 포개어 보고는 아찔함에 잠시 눈을 감는다.

TIP
청하동천靑霞洞天
하늘 아래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자풀이를 직역하자면 하늘 아래 푸른 노을의 마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옛날 석천계곡에는 도깨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석천정사에서 수학하던 서생들이 많은 괴롭힘을 당했고 충재 권벌의 5대손인 권두옹이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빨간 칠을 하여 필력으로 도깨비들을 쫓아냈다고 한다.

달실마을과 청암정
석천계곡을 나오면 야트막한 동산 아래, 마치 단체로 편하게 쉬고 있는 학들의 무리처럼 포근해 보이는 마을이 있다. 닭실마을로도 불리는 달실마을은 암탉과 수탉이 앞뒤로 감싸 안는 형국을 하고 있는 사이에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을 이르는 ‘금계포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예전부터 조선시대 실학자였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꼽은 4대 길지경주 양동, 안동 하회와 내앞, 봉화 닭실 중 한 곳이었다. 권벌 선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권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달실마을은 보통 유명세를 타게 되면 자의든 타의든 번잡함을 받아들이기 마련인데, 아직 평온함과 고즈넉함이 넘쳐 고결한 기운마저 감도는 곳이었다. 사찰도 아닌 유적도 아닌 자그마한 마을 자체에서 이런 느낌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비가 지나고 갑자기 해가 나타난 터라 마을 입구에서는 또렷하게 흙냄새가 번져왔다. 내성천이 수로를 타고 흐르는 마을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터전이지만 마을 자체에서 풍기는 양반의 기품 때문인지 어떤 아우라마저 서려있었다. 붉은 색으로 새롭게 칠해진 진입로를 지나면 옥잠화와 백일홍이 담장 밑에서 가지런하게 마을을 안내한다. 담장 너머 작은 소리하나 나지 않는 이 마을에 나무 땔감과 너른 논을 뛰어노는 흰 강아지 그리고 처마에 매달린 옥수수만이 여행자를 반긴다. 이곳은 마을 자체가 커다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오른편으로 돌아 청암정으로 향한다. 충재 권벌이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연루되어 낙향한 후 거북바위 위에 지은 정자인 청암정은 얼마 전까지 무료로 개방되었던 곳이나 이곳을 방문한 방문객들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갖가지 무례와 무지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현재는 예약자에 한해서 유료 개방하고 있다. 바로 옆 충재박물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권벌 선생의 후손인 학예사로부터 들은 그 황당함을 넘어선 비속한 사례들은 마땅히 이곳을 부분 개방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케 했으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잠정적으로 폐쇄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고귀한 문화를 스스로 짓밟는 사람들. 그것이 씁쓸하지만 우리들의 얼굴인 모양이다. 나는 사진으로나마 보았던 홍시빛으로 감도는 해질녘의 청암정을 애써 보지 않기로 했다. 단풍이 미친 듯이 물드는 가을날의 청암정도 보지 않기로 했다. 청암정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면, 그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TIP
1) 닭실마을은 원래 500여 년 동안 달실마을이었다. 달은 경북 북부지역 닭의 사투리인데 근래 표준어 사용의 엄격한 적용을 받아 현재는 닭실로 쓰이고 있다. 달실마을 사람들은 닭실보다는 자신들의 고유명사로 오랫동안 써왔던 달실로 불리길 바라고 있다.
2) 달실마을은 또 500년이 넘는 동안 유과를 만들어 온 유과의 명소이다. 여름철이라 눅눅해지는 유과의 특성 상 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달실은 간단한 먹을거리 하나 허투루 보내지 않고 지켜오고 있는 셈이다.

춘양을 지키다, 만산고택
춘양은 조금 과장을 보태서 한국의 시베리아라고 불린다. 3월까지 잔설이 강하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얼음이 얼며 남쪽에 비가 오면 이곳에는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얼마나 갈망했으면 봄볕이라는 이름이 아예 지명이 되었을까. 이런 춘양에는 한반도 남단 최고의 목자재로 치는 춘양목의 군락지가 있다. 춘양목은 춘양지역에서 자라는 금강송에 붙이는 이름으로 예전 궁궐이나 부호들 저택의 건축에는 이 춘양목이 빠짐없이 들어갔다. 해서, 춘양은 과거에 엄청나게 큰 목재 출하지가 있던 도시였다. 면 단위 춘양의 재래시장이 예전부터 봉화의 시장보다 훨씬 큰 이유이다. 이런 춘양목과 봄볕의 성지인 춘양으로 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고택을 보기 위해서이다. 봉화에는 개암종택과 만회고택, 남호구택과 소강고택, 성암재, 팔오헌종택 등 실로 전통가옥의 산실로 불릴 만큼 고택들이 즐비한데 그 중에서도 춘양지역에 있는 만산고택은 현존하는 조선말기 개인 한옥 중 최고 수준의 건축미를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기에 봉화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거쳐 가는 마지막 낙관과도 같은 곳이다. 만산晩山이란 고택을 지은 고종 때의 문신 강용1846~1934의 호로, 만산은 두루 관직에 종사하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한 후 1878년에 이 가옥을 지었다. 솟을 대문으로 들어가면 대대로 이곳에서 살고 있는 강용선생의 진주 강씨 후손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특별한 꾸밈이 없는 마당에는 대추나무 한그루가 이 고졸한 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도예를 하는 안주인의 작품들 하나하나는 이 가옥을 꾸미는데 세심함을 보탰다. 기왓장으로 장식한 마당의 작은 꽃밭은 이 가옥의 숨겨진 백미다. 행랑채에는 만산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기만성’을 의미하는 말로 흥선대원군이 썼다. 비록 탁본이고 원본은 서울의 박물관에 있지만 확실히 글에 무게가 담겨있다. 주인장은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여행자에게 음료수를 내오며 이것저것을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대화 곳곳에는 확실히 양반가문 후손으로써의 자부심과 배려심이 배어 있다.
만산고택은 행랑채 뒤편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꾸며져 있고 오른편에 서실 그리고 낮은 담장을 두고 왼편으로 조금 떨어진 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서실의 현판 중 고아한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의 ‘한묵청연翰墨淸緣’은 비운의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고 한다. 만산고택에서 주목할 것은 무려 스물한 개에 달하는 중요한 편액이 있어 조선의 편액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장소라는 점이다. 칠류헌七柳軒으로 조심히 옮겨본다. 구석의 호두나무는 우직하게 뒷마당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손님이 오면 모시는 장소, 즉 영빈관으로 쓰이는 곳으로 현재도 인문학 강좌나 토크 콘서트 등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결혼식과 숙박도 가능하다. 칠류헌의 현판 역시 애국지사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독립운동가인 오세창의 글씨다. 언젠가 사진에서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의 만산고택을 본 적이 있다. 추운 날 이 오지 중의 오지인 봉화에서도 춘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겨울 하늘 만산고택에서 바라보는 새벽의 별은 어떨까. 나는 그런 날을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석천정사에 느꼈던 같은 감정이 다시금 스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분천역
이제 분천역으로 갈 시간이다. 말하자면 더욱 봉화의 깊은 속살로 들어가는 것이다. 춘양역까지 걸어가서 기차 편을 알아보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타고 갔다. 20km나 되는 거리에 있어 가는 동안 내내 산으로 둘러싸인 봉화의 오지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분천역으로 간 이유는 분천역에서 태백의 철암역까지 운행되는 백두대간협곡열차인 V트레인을 타기 위함인데 도착한 분천역은 한 여름임에도 뜻밖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2014년 겨울, 분천역은 스위스의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을 맺고 이 작은 역을 산타마을로 조성해 이야기가 풍부한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관광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한시적이었던 산타마을은 철거하지 않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이디어 하나가 봉화를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가로운 분천마을을 잠시 둘러보고 기차를 탔다. 평일인 탓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차여행의 장점은 속도를 느리게 느끼는데 있다. 기차처럼 일정한 호흡으로 덜컹거리고 알맞은 속도로 꾸준하게 가는 탈 것은 많지 않다. 앞을 보며 달리지만 적당히 옆과 뒤도 바라볼 수 있는 기차. 그래서 기차를 타면 미처 몰랐던 지나왔던 감성들이 어느 한 구석에서 슬며시 피어나는가 보다. 기차는 한국에서 가장 작은 역이라는 양원역에서 잠시 선다. 예전에는 이 구간에 양원역이 없었다. 주변의 원곡마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려면 우선 짐 보따리들을 창밖으로 던져놓고 분천이나 승부로 간 다음 짧지 않은 그 길을 걸어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곳에 기차가 선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힘을 합쳐 대합실과 승강장을 만들고 이정표를 세워 지금의 양원역을 만들어 냈다.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만든 역이나 다름없다. 몇 명 찾아오지도 않는 이 역에서 부부가 떡과 막걸리를 팔고 있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놀랄 만큼 아름답다. 그것은 산 속 깊은 곳에서 자연과 벗하는 삶의 얼굴이었다. 양원역에 잠시 정차했던 기차는 승부역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배바위 고개를 넘어 비동마을을 지나 분천역까지 10km의 낙동정맥 트레일 구간이 시작된다. 아래로 방향을 잡아 걷는다면 양원역까지는 5.6km의 거리이고 구암사까지 이어진다. 어디로 가든 실로 오지 중의 오지를 만나는 루트이다. 기차는 다시 몇 개의 산을 통과해 달렸고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 철암역에 도착했다. 강원도로 넘어온 것이다. 그간 강줄기를 따라 협곡을 지났고 그 속에 숨어있는 비경을 보았으며 몇 번의 탄성을 질렀다. 손을 흔드는 트레커를 보았고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배추밭과 하얀 연기를 뿜고 있던 커다란 석탄 공장도 지났다. 기차는 다시 이곳에서 봉화로 되돌아 갈 것이다. 많은 감성들을 지니고 있는 기차에서 내리면, 내림과 동시에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일순간에 사라지곤 한다. 나는 되돌아가지 않기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내 뒤편으로 다시 봉화가 남는다.

TIP
<분천-철암 열차시간>
10:20 ~ 11:22 (평일/주말)
14:00 ~ 15:01 (평일/주말)
17:15 ~ 18:10 (주말)
​<철암-분천 열차시간>
12:10 ~ 13:10 (평일/주말)
15:50 ~ 16:46 (평일/주말)
18:40 ~ 19:41 (주말)
요금 : 편도 8,400원

<발문>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라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맹이다

제공 : 모두투어(www.modetour.com, 1544-5252), TRAVEL MAGAZINE GO ON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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