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순간] 4. LPGA 6승 박지은 “가족과 함께한 우승이야말로 축복받은 우승”

입력 2018-09-07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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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1세대 박지은이 생각하는 인생 최고의 순간은 바로 온 가족이 함께 뜨거운 응원을 보내줬던 2004년 CJ나인브릿지클래식 때다. 골프채를 놓은 지금도 하루하루 그 소중함을 알아가는 중이다. 현역 때나 지금이나 항상 그를 든든하게 지원하는 것은 바로 ‘가족’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동아DB

2004년 10월 31일, 제주 나인브릿지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CJ나인브릿지클래식 최종 라운드. 박지은은 1, 2라운드 내내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그 해 3월 나비스코챔피언십 이후 무려 6차례나 준우승을 한 터였다. 또 2000년 데뷔 이래 해마다 1승씩 밖에 올리지 못한 징크스도 불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18번홀(파5) 티샷을 한 박지은은 우승을 예감한듯 환하게 웃었다.

세 번째 샷을 홀 1.2m에 붙인 뒤에는 챔피언 퍼트를 버디로 장식했다. 선수생활하면서 이날처럼 샷 감각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고 했을 정도로 완벽했다. 3라운드 합계 16언더파 200타로 국내 무대 첫 승과 함께 처음으로 한 시즌 2승을 기록했다.

박지은(39·SBS해설위원)의 골프인생 최고 순간은 CJ나인브릿지클래식이다. 우리 기억 속에 가장 강렬했던 그의 우승은 나비스코챔피언십이다. 자신의 첫 메이저 우승이자 박세리에 이은 한국선수 두 번째 메이저 우승 대회다. 전통에 따라 연못에 풍덩 빠지던 우승 세리머니는 지금도 생생하다. 당연히 최고의 순간으로 택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나비스코가 없었다면 저를 기억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인브릿지만한 대회가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미국에서 활동할 때는 혼자 투어생활을 했다. 우승을 해도 기쁨은 잠시다. 트로피를 받고, 세리머니를 하고, 기자회견을 한 뒤 숙소로 돌아온다. 딱 거기까지다. 자고 나면 곧바로 다음 대회를 위해 이동해야 한다. 우승을 만끽할 시간이 없다. 특히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그게 아쉬웠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열린 대회는 달랐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로부터 열렬하게 우승 축하를 받았다.

“수많은 갤러리가 모였는데, 아마도 그 중 절반은 내가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웃음). 그 덕분에 경기가 잘 풀렸다. 앞선 5승은 모두 마지막 홀, 마지막 퍼팅까지 숨 막히는 승부였다.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6승째이자 프로생활 마지막 우승을 할 때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당시 스코어보드 기재가 허술했던 탓에 17번 홀까지 다른 선수의 점수를 몰라 엄청나게 긴장했다. 그런데 18번 홀에 와서 기록을 확인하니 5타차 선두였다. 그때서야 안심이 됐다. 세컨드 샷을 치고 걸어가는데, 코스 안 다리 위에 엄청난 갤러리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나도 하이파이브로 기쁨을 나눴다.

그들은 내게 마무리 버디까지 할 수 있는 힘을 줬다. 정말 축복 받은 우승이었다.”

LPGA에서 한국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우리 선수끼리 우승을 다툴 때가 많다. 각종 랭킹에서도 내부 경쟁이 치열하다. 이런 존재감의 근원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등 LPGA 1세대의 역할이 컸다.

2004년 CJ나인브릿지클래식에서 우승한 박지은. 사진제공|CJ


이들 중 막내인 박지은은 초등학교 때 골프 유학을 떠나 일찌감치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한 유망주였다. ‘그레이스 박’으로 불린 그는 1992년부터 주니어 경기에 출전해 1994~1997년까지 미국 주니어랭킹 1위에 올랐다. 1998년 골프 명문인 애리조나주립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아마추어 통산 55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아마추어 때는 홀에 공을 넣는다는 생각 이외에는 없었다. 공도 잘 쳤다. 대학에서는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연습했다. 연습도 1등할 수 있을 만큼만 했다. 그래도 나가면 1등을 했다.”
2000년 LPGA 무대에 데뷔한 뒤 2012년 6월 은퇴할 때까지 통산 6승을 거뒀다. 그는 “정말 무식하게 골프를 쳤다”고 했다.

“프로생활 중 가장 힘든 건 이동이다. 미국이라는 넓은 땅덩어리를 돌아다니는 건 만만치 않다. 대회 끝나면 곧바로 짐을 싸야한다. 모든 대회를 다 출전해야하는 줄 알았다. 시즌 중 쉬는 날은 없었다. 마냥 스케줄에 끌려 다녔다. 또 쉬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처럼 관리를 받지 못했다.”

10여년의 프로생활 중 그를 가장 괴롭힌 건 부상이다. 그의 표현대로 안 받아본 치료, 안 가본 병원이 없을 정도로 부상에 시달렸다. 안타까운 건 프로 데뷔할 때 준비가 덜 됐다는 점이다.

“아무 준비 없이 공 잘 친다는 이유로 프로로 전향했다. 기술적으로는 준비가 됐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2000년 1월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네이플스메모리얼대회가 데뷔 무대였는데, 모든 언론에서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거기서 머리에 한방 맞은 듯 아찔했다. 3~4개월간은 ‘멘붕’ 상태였다. 그러다가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하는 걸 느끼면서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6월 캐시아일랜드그린스닷컴에서 처음 우승했다. 그때부터 상승세였다. 하지만 8월 허리부상이 왔다. 설상가상 치료 과정에서 갈비뼈에 금이 가고 말았다(투어 밴에 있는 치료사가 허리뼈를 맞추다가 잘못됐다). 8월부터 10월까지 열린 11개 대회를 못 나갔다. 거의 손에 넣었던 신인상도 놓쳤다. 그 이후 허리뿐 아니라 고관절 등도 좋지 않았다.

은퇴 전 마지막 불꽃을 태울 기회가 있었다.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2010년 말 만난 의사를 통해 컨디션을 되찾았다. 2011년엔 기권 없이 전 경기를 뛰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다. 서른두 살에 KLPGA 시드권도 따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2012년 전반기엔 미국, 후반기엔 한국에서 뛸 생각이었다.

샷 감각이나 퍼트, 거리 모두 잘 나왔다. 그런데 단 하나, 스코어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될 듯하다가도 계속 점수를 까먹었다. 그 때문에 지쳐갔다. 투어생활 처음으로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시절이 끝났다는 느낌이 왔다. 시즌 중 2주간의 휴식이 끝난 뒤 대회장에 갔는데, 골프장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골프채를 놓았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지금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고 했다.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가족과 함께 했던 나인브릿지클래식을 선택한 것처럼 지금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며 웃었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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