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그후 20년…박세리, 다시 희망을 말하다

입력 2018-09-2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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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체를 덮친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의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던 1998년 7월, 박세리는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 골프코스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오픈에서 정상에 오르며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겼다. 박세리가 20일 스포츠동아와 만나 옛 추억을 더듬고 있다. 용인|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박세리(41). 이름 하나만으로 커다란 울림을 주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국민 모두가 힘들어하던 20년 전. 그해 나이 겨우 21살의 앳된 골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희망이었다. 한 마디 말보다 힘찬 스윙 하나가 더욱 큰 위로가 되는 시절이 바로 그때였다.

대한민국 전체를 덮친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의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던 1998년 7월. 박세리는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 골프코스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오픈에서 20홀 연장 끝에 동갑내기 아마추어 제니 추아시리폰(태국)을 꺾고 정상에 올랐다.

우승 포효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연장 마지막 홀에서의 해저드 샷이었다. 드라이버샷이 연못 근처 수풀로 향한 탓에 패색이 짙었던 상황. 고심하던 박세리는 연못에 두 발을 담그기 위해 신발과 양말을 차례로 벗었다. 그런데 이때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양말 속에 숨어있던 발목이었다. 새까맣게 타있던 두 다리와 상반되는 하얀 발목은 ‘골프 여왕’의 피나는 노력을 말해주는 상징이 됐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20일 경기도 용인시 88 컨트리클럽에서 박세리를 만났다. 현역 시절 수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곳이지만 박세리는 더 이상 선수 호칭으로 불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이름을 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중도해지OK정기예금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의 호스트로서 후배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박세리. 용인|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아직도 20년 전 연못 샷은 어제 일 같아요”


-골프 여왕의 근황이 궁금하다.

“참 바쁘다. 은퇴를 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탓에 늦깎이 사회 초년생으로서 이곳저곳을 열심히 누비고 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더라. 따로 취미생활을 즐길 시간도 없다. 물론 현역시절 내내 운동만 한 탓에 별다른 취미도 없긴 하지만….”


-여전히 필드 곁에서 분주한 모습이다.


“선수 때보다도 더욱 바빠졌다. 현역으로 있을 때는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면 됐는데 지금은 소화해야할 일정이 너무 광범위하다. 오히려 여유가 더욱 줄어든 느낌이다.”


-6월 US오픈 때는 우승 20주년을 맞아 LPGA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솔직히 말하면 은퇴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로프 밖에서 선수들을 따라다닌 적은 처음이었는데 가끔은 필드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20년 세월이 금방 흘렀나.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른다. 거짓말처럼. 아직도 우승 장면을 보면 그 생생함이 가득하다. 마치 어제 일 같다. 이번 US오픈 방문 때도 당시 관계자들과 선수들을 만나 그때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추억에 깊이 빠졌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분이 그때 들더라.”


-마침 이번 대회에선 20년 전처럼 한국과 태국 선수 간의 연장 맞대결이 펼쳐졌다.

“마지막까지 김효주(25)의 우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아리야 주타누간(23·태국)이 연장 첫 번째 홀에서 실수를 하면서 (김)효주가 우승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준우승에 그쳐 너무나도 아쉬웠다.”

-20년 전 기억이 떠올랐을 듯한데.

“그때는 최종라운드 다음날 연장전을 치렀다. 어찌나 잠이 오지 않던지…. 지금과 달리 연장전은 18개 홀을 도는 방식이었다. 그리고서도 승부가 나지 않아 2개홀을 더 돌았다. 참으로 길었던 5일이었다.”

1998년 20년 전 박세리의 모습.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20년 지난 지금도 골프로 희망 드리고 싶어요”

-20년 전 당시는 IMF 위기로 모두가 힘들 때였다. 연장 우승이 큰 위로가 됐다.


“1998년 미국으로 떠날 때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초반 부진하면서 3개월 만에 ‘국내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기가 생겼다. 되든 안 되든 밀어붙이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LPGA 챔피언십과 US오픈, 두 메이저대회를 연달아 제패하게 됐다.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께서 ‘당시 우승이 큰 힘이 됐다’고 이야기해주신다. 특히 노래 ‘상록수’와 연못 샷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컸던 느낌이다.”


-21살 나이로 당시 사회 분위기를 느끼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맞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 많이 체감하진 못했다. 그러나 뉴스와 주변 이야기를 통해 점점 분위기를 느끼게 됐다. 그때 이후 내가 희망의 아이콘처럼 떠오르기까지 했다(웃음). 나 역시 어렸을 때라 참 부담이 많이 됐다.”


-이후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 역시 사회 이곳저곳에서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끔은 1998년 금융위기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말을 듣곤 한다. 경제도 경제지만, 사회 자체가 너무나 빠르게 변해버리니까 많이들 그렇게 느끼시지 않나 생각한다. 나 역시 적응이 힘들 정도니까 말이다. 그래서 더욱 책임감이 크다. 가수는 노래로, 배우는 연기로, 운동선수는 경기로 희망을 드린다는 말이 있지 않나. 은퇴를 했지만 해야 할 일은 아직 많다.”


-실제로 골프 관련 직함이 여럿 있다. 일단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을 5년째 열고 있다.

“선수로 뛰어봤기 때문에 선수들을 위한 대회를 만들고 싶었다. 골프장 환경부터 코스 관리, 연습 체계까지. 규모 역시 매해 조금씩 커지고 있는데, 선수들이 박세리 인비테이셔널 우승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국내에서 열리는 여자골프 국가대항전 UL 인터내셔널 크라운 명예조직위원장도 맡았다.

“팬들께서 골프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사실 골프는 국가대항전이 많지 않은데다가 국내에서는 이를 쉽게 접하기 어렵다. 물론 LPGA 투어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가 국내에서 열리기는 하지만 이번처럼 국가대표들 간의 맞대결은 큰 매력을 지니고 있다. 선수들과 팬들이 대회를 마음껏 즐겼으면 한다. 물론 유력한 우승후보는 역시 한국이다(웃음).”

박세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중도해지OK정기예금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의 호스트로서 후배들을 맞이하고 있다. 용인|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다시 골프채 잡을 준비는 아직이에요”

-선배의 노력에 보답하듯 후배들이 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너무나도 고맙다. 뿌듯하기도 하다. 사실 많은 후배들이 어릴 적 쉽지 않은 환경에서 골프를 시작한다. 선진국처럼 저변이 잘 돼있지도 않고, 교육 프로그램 역시 체계적이지 못하다. 그런데도 내로라하는 투어에서 우승을 독차지한다. 이런 흐름이 계속 갔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따로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쉽진 않겠지만 후배들의 성장 환경을 제대로 만들어주고 싶다. 한국골프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미국 같은 경우는 선수 개별 특성에 맞는 육성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모자란 점이 많다. 외국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한국은 도대체 어떤 시스템을 갖췄기에 이처럼 세계적인 선수가 많이 배출되느냐고. 나중에는 이러한 질문에 마음껏 답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가꾸는 일이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직함이 참으로 많다. 감독부터 위원장, 해설위원, 박세리희망재단 이사장까지. 어떤 직함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


“아무래도 감독이다. 2016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은 정말 뜻 깊은 경험이었다. 후배들도 부담감 때문에 어려웠겠지만 감독 역시 만만한 직책이 아니더라. 다 해주고 싶어도 다 해줄 수 없는 자리가 감독이었다. 그런데 그만큼 애착이 따르기도 했다.”


-은퇴 이후 골프채를 다시 잡지 않고 있다고 들었다.

“현역시절 다짐을 했다. 후회 없이 골프를 친 뒤 은퇴를 해야겠다고 말이다. 덕분에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골프를 쳤다. 주위에서 함께 필드로 나가자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지만 아직 내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마 내년 정도는 돼야 클럽을 다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끝난 LPGA 투어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동년배 안젤라 스탠포드(41·미국)가 우승을 거뒀다. 현역에 대한 미련은 없는가.

“앞서 말했듯이 나는 현역시절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이제 미련은 없다.”

용인|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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