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이치로가 2001시즌 MLB에 몰고 온 폭풍의 히스토리 되돌아보기

입력 2018-04-23 13: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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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치로와 루틴 시리즈 3편
체격 작고 스태미나 떨어지는 동양인 포지션 플레이어는 실패?
빅리그 적응 위해 2000년부터 이치로가 준비한 변신은 무엇?
센세이셔널 한 데뷔와 그 송구…결점 없던 타자의 약점은 무엇?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까지 동양인 출신 야수는 없었다.

5~6일의 등판간격이 있는 선발투수는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있지만, 체격이 작고 스태미나가 부족한 동양인 야수는 4시간의 시차가 나는 넓은 미국땅을 180일 동안 돌아다니며 162경기를 소화하는 강행군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참고로 일본은 199일 동안 142경기를 치른다.

더군다나 일본야구 특유의 똑딱 타법으로는 메이저리그의 불같은 강속구와 날카로운 변화구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빅리그 적응 위해 근육을 불리고 시계추 타법을 버리다!


수족관을 박차고 나온 큰 물고기 이치로는 2001시즌을 앞두고 시애틀 유니폼을 입었다. 그때는 누구도 몰랐다. 이치로의 몸이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새 유니폼을 입은 이치로는 눈에 띄게 빵빵하게 보였다. 유니폼이 찢어질 정도였다.

오릭스 시절 프로필에 나온 이치로의 프로필은 키 175㎝에 몸무게 71㎏이었다. 이치로는 2000년 시즌 중반부터 2001시즌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체중을 9㎏ 늘렸다. 이 때문에 팔과 어깨, 허벅지의 근육이 눈에 띄게 불었다. 호사가들은 이치로가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을까 의심도 했다. 이치로는 퍼시픽리그 선수들을 중심으로 출전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일본대표팀으로 나서지 않았다. 혹시 모를 도핑을 염려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차근차근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근육 불리기부터 준비해온 이치로에게 적응할 것은 또 있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피칭 스타일이었다. 일본 투수들과는 달랐다. 스피드와 구위도 그랬지만, 템포에서 차이가 컸다.

힘을 모아서 던지는 피칭 스타일의 일본 투수들은 컨트롤을 정교하게 만들고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하나, 둘, 그리고 셋’의 템포로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하나, 둘, 셋’으로 곧바로 넘어갔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성공했던 시계추 타법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시범경기를 맞았다.


●누구도 이치로의 성공을 예상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프로야구에서 7시즌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동양에서 온 신인타자를 바라보는 메이저리그의 눈길은 부정적이었다. 방송해설가 롭 디블은 시애틀 루 피넬라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만일 이치로가 타격왕을 차지하면 내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발가벗고 달리겠다”고 장담했다.

디블과 피넬라는 1990년 신시내티에서 감독과 선수로 뛰었던 사이다. 그해 신시내티는 ‘내스티 보이스’라는 별명의 불펜투수 3총사(디블·놈 찰튼·랜디 마이어스)를 데리고 시즌 개막부터 시즌 끝까지 단 하루도 1위를 놓치지 않는 진기록을 세우며 월드시리즈도 제패했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토니 라루사 감독이 이끄는 오클랜드였다.

피넬라도 이치로의 실력을 미심쩍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범경기 초반 타격을 보면 더욱 걱정이 됐다. 그는 계속 공을 밀어서만 쳤다. 투구의 윗부분을 때려 땅볼을 만드는데, 대부분이 레프트 쪽으로 가는 단타였다. 피넬라는 혹시 파워가 부족하거나 메이저리그의 빠른 공에 대처하지 못해서 그러는지 걱정이 됐다. “혹시 당겨서 칠 줄은 아냐”고 물었다. 이치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때가 되면 그렇게 할 것이다.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치로는 그때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상대로 자신만의 타격존을 만들고 있었다. 가상의 공간에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오는 공을 어느 코스로 보낼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스트라이크존도 함께 설정한 그는 레프트에서 시작해 센터, 라이트 쪽으로 타구를 보냈다. 스프링캠프 막판 실험이 끝났다고 생각한 이치로가 마침내 걱정 많은 피넬라 감독을 안심시켰다.

타구를 잡아당겨서 쳤다. 힘이 실린 라인드라이브 타구는 라이트 펜스를 훌쩍 넘어갔다. 피넬라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그렇게 타구의 방향을 조절하는 배트 컨트롤을 가진 타자는 처음 봤다”고 실토했다. 시범경기에서 타율 0.321을 마크한 이치로는 마침내 개막전에 등장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자신만의 타격존을 완성한 이치로 빅리그를 놀라게 하다!


세이프코필드에서 벌어진 오클랜드와의 홈경기였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아버지 스즈키 노부유키도 시애틀로 날아갔다. 호사다마라고, 아버지는 좋은 날을 앞두고 공항에서 강도를 당했다.

4만3000여명의 관중들 앞에서 이치로는 2안타를 때리며 멋진 신고식을 했다. 2번째 안타는 놀랍게도 기습번트였다. 9회 오클랜드 내야진의 운동능력을 테스트하는 듯한 그 번트 덕분에 시애틀은 역전승을 거뒀다. 승리에 흥분했던 피넬라 감독은 중계하는 현지 일본방송의 카메라 앞에서 이치로에게 격하게 뽀뽀했다.

이치로의 안타행진이 시작됐다. 15연속경기 안타, 23연속경기 안타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4안타를 몰아친 경기도 3번이었다. 텍사스와의 경기에선 연장 10회 끝내기 홈런도 때렸다. 경이로운 활약이었다.

6월 초 미국의 유명한 스포츠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의 표지모델로 이치로가 등장했다. 마침 그 주에 미국의 모든 영화관에선 2차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다룬 ‘진주만’이 개봉했다.

시즌 타율 0.366, 만루상황에서 5할의 맹타를 휘두르는 이치로는 즉시 아메리칸리그 투수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됐다. 어떤 코스든, 어떤 구종이든, 왼손과 오른손 투수를 가리지 않았다. 빈틈이 없었다. 눈과 배트의 연결능력을 보여주는 수치는 더 놀라웠다. 이치로가 휘두른 배트 가운데 94%가 공을 때려내는 상상 이상의 정확성. 메이저리그 안타기계로 유명한 웨이드 보그스가 전성기에 보여줬던 능력 이상의 수치였다.

타구를 외야 곳곳에 뿌리는 기술도 놀라웠지만, 이치로에게 특별한 것은 내야안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땅볼을 굴리고 1루로 달리면 안타가 됐다. 공을 때리고 1루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고작 3.6초였다. 달리면서 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이치로의 타격&스타트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결국 상대팀들은 이치로가 나오면 시프트 수비를 하며 내야안타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대부분이 허사였다. 이치로의 등장으로 시애틀은 승리기록을 새롭게 만들어갔다. 이전까지 켄 그리피 주니어와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장타를 앞세운 대포를 팀 컬러로 했지만, 이치로가 가세한 뒤에는 안타와 도루, 희생타로 점수를 내는 새로운 야구를 정착시켰다. 클린업타자가 등장하기도 전에 선두타자 이치로가 혼자서 안타, 도루로 득점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타격뿐 아니라 수비와 도루에서도 완벽했던 올스타


공격뿐만이 아니었다. 송구도 무시무시했다. 오클랜드와의 경기. 외야 60미터 거리에서 미사일 송구로 1루에서 3루를 노리던 주자 테렌스 롱을 잡았다. 여유 있게 3루에서 살 것이라고 믿었던 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뒤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 주자는 아니지만, 그 송구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빨랐다”고 했다. 이치로의 그 송구는 이후 2001시즌 시애틀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고, 방송사의 예고화면으로 쓰였다.

전반기가 끝나자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메이저리그 감독들을 상대로 투표를 했다. 이치로는 아메리칸리그 주자 가운데 1위, 타자 가운데 2위, 외야수 가운데 3위의 표를 얻었다. 텍사스 포수 이반 로드리게스는 “이치로가 최고”라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올스타 투표에서도 이치로는 337만3000표를 받았다. 2위와 무려 80만표 차이가 났다. 그해 메이저리그는 처음으로 인터넷 투표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를 이용해 몰표를 보내준 일본 팬들의 덕분이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1시즌 이치로가 시애틀에 가져다준 경제효과


이치로 효과는 야구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 시애틀에 엄청난 부를 안겼다.

입장관중 수치는 연일 구단 신기록이었다. 이치로를 내세운 상품도 잘 팔렸다. 포스터와 티셔츠, 외투는 물론이고 사인이 들어간 야구공은 무려 50만원에 팔렸다. 7월 이치로 보블헤드 인형을 프로모션 상품으로 내건 경기는 티켓 판매가 전보다 30% 늘었다. 일본에서 이치로의 경기를 보러온 일본 팬들이 늘면서 시애틀의 호텔 예약이 20% 늘었다. 200만원을 들여 이치로의 경기를 보러 오는 일본의 투어상품이 새로 생겼다.

세이프코필드 매점에는 스시가 등장했다. 이치롤스라는 이름이 붙은 참치 초밥은 9000원에 팔렸다. 경기장 광고판에도 일본어로 쓴 닛산자동차 광고가 보이기 시작했다. 경제전문가들은 이치로가 향후 5년간 시애틀에 안겨줄 경제효과가 1000억원이라고 예측했다.

일본에서도 이치로의 선풍은 이어졌다. NHK는 아예 세이프코필드 스탠드 상단에 방송용 부스를 차리고 시애틀의 모든 경기를 중계했다. 시범경기와 플레이오프까지 포함해 그해 182경기가 실시간으로 일본에 생중계됐다.

일본 팬들은 16시간의 시차를 두고 매일 오전 이치로의 경기를 TV로 봤다. 택시 기사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치로의 경기 상보를 들었다. 일본의 14개 스포츠전문지들도 대목을 맞았다. 매일 이치로의 뉴스를 다뤘다.

종합지와 TV 채널은 물론이고 주간지, 월간지도 온통 이치로 얘기였다. 타블로이드 신문 ‘석간후지’는 아예 신문의 뒷면을 이치로 면으로 만들고 매일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그 바람에 신문판매가 엄청 늘었다.

반면 일본인의 7할이 팬이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청률은 1954년 이후 처음으로 떨어졌다. 이치로 탓이었다.


●극성맞은 일본 매스컴과의 전쟁, 마침내 드러난 이치로의 약점


세이프코필드에는 이치로를 취재하기 위해 온 166명의 일본기자들이 진을 쳤다. 이들은 이치로가 임시로 거주하는 집 앞에도 카메라를 설치했다.

이들은 어떤 뉴스라도 이치로에 관한 새로운 것을 원했다. 시애틀 홍보담당자는 죽을 맛이었다. 별별 사소한 일이 다 뉴스였다. 이치로의 아내가 브렛 분에게 도시락을 싸준 것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어느 기자는 타격코치 존 매클랜에게 “어제 이치로가 214번의 스윙을 하고 오늘은 196번을 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냐”고 물었다. 몇몇 극성 기자들은 이치로의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에서 뭔가를 건져보겠다고 쓰레기통을 뒤졌다. 이웃들에게 이치로와 관련돼 성가실 정도로 질문을 했다.

마침내 일본의 폭로 전문지는 이치로의 누드 사진을 찍어오는 사람에게는 10억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뉴스가 나오자 이치로는 거주지를 옮겼다. 경기장에서 샤워할 때도 혼자서 했다. 이치로는 샤워 장면을 찍어서 팔고 10억원을 나눠가지자는 시애틀 동료의 은밀한 제안도 거절했다.

이런 일본 매스컴의 이상 취재열기에 ESPN 리포터는 “마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야구를 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치로를 막기 위해 상대 투수들이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위협구였다. 몸쪽 높은 공을 던졌다. 이치로는 그 공도 쳐냈다. 어떤 때는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 하지만 이치로는 겁먹지 않았다. 다음 타석에서 더 바짝 홈플레이트 쪽으로 붙었다. 때리면 맞고 나가겠다는 의지였다. 맞고 나가면 반드시 도루를 해서 앙갚음을 했다.

이처럼 완전무결했던 이치로에게 마침내 허점이 드러났다.<계속>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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