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박태준과 최순호, 그리고 선견지명의 유스시스템

입력 2018-11-13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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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의 축구사랑은 각별했다.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포항 스틸러스는 명문구단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육성을 중시한 박 명예회장은 축구유망주 발굴에도 앞장섰다.

평생 제철보국(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의 신념을 잃지 않았던 박태준(1927~2011) 포스코 명예회장은 철강만큼이나 축구도 사랑했다. 그는 기업이 낸 성과는 반드시 사회에 돌려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축구였다. 축구는 팀워크를 중시하는데다 지구촌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여서 외교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1960년대 대한중석 사장 시절은 물론이고 1970년대 포항제철에서도 축구팀을 창단했다.

그는 한국축구의 선구자였다. 국내 최초의 전용구장과 클럽하우스를 만들었다. “축구를 하는 나라에 제대로 된 축구장 하나는 있어야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90년대 축구기자들이 포항 출장을 선호한 이유 중 하나는 국내 유일의 전용구장(스틸야드)에서 관전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국내 처음으로 유스시스템을 도입한 선견지명도 평가할만하다.

불도저 같은 스타일로 제철소를 만들었지만, 축구선수들을 대할 때는 살가웠다. 이름깨나 있는 선수치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최순호(포항 감독)와의 인연은 특별했다. 고교 때부터 시작된 인연은 평생을 갔다.

청주상고 시절 최순호의 꿈은 포항제철 입단이었다. 당시 그곳은 국가대표선수가 넘쳐났던 최고의 팀이었다. 가능성을 인정받아 2학년 말 입단에 합의했고, 3학년부터는 포항을 오가며 선배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 때 박 회장을 처음 봤다. “귀인처럼 느껴졌다”고 최 감독은 회상했다. 이어 “회장님은 우선 지원을 충분히 해주는 등 여건을 만들어준 다음 성과를 내라고 주문하셨다. 그런 분위기 덕분에 포항에는 언제나 최고의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 10대인 내가 들어갔다. 햇병아리인 내가 거기서 성장을 해 장닭이 됐으니 회장님께서 애정을 주신 것 같다”고 했다. 최순호는 1980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등 포항 입단 이후 폭풍 성장을 거듭하면서 한국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었다.

이미 다 자란 선수보다는 미완의 재목이 커 가는 모습에 흐뭇해한 건 박 회장의 의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단이 선수를 육성해 인재를 만들어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한 축구인은 “이미 완성된 선수는 생산의 성격보다는 소모의 성격이 강하다고 회장님은 생각하셨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최순호 현 포항 감독은 고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포항에서 훈련하며 최고의 스타로 성장했다. 스포츠동아DB


포항에서 럭키금성(현 FC서울)으로 이적한 뒤 다시 포항으로 복귀한 사연이나 현역 은퇴 후 공부를 하겠다며 떠난 프랑스 축구유학, 그리고 긴 공백 끝에 1999년 포항 코치를 맡게 된 배경도 박 회장의 뜻이었다고 최 감독은 전했다.

코치와 감독대행을 거쳐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포항 지휘봉을 잡은 그는 박 회장의 뜻대로 유스시스템을 도입했다. K리그 구단 중 최초다. 최 감독은 “회장님은 항상 시스템과 매뉴얼을 강조했다”고 기억했다. 주먹구구로 하지 말라는 가르침인데, 그게 유스시스템의 핵심이다.

지금이야 모든 구단들이 연령별 유소년 팀을 꾸리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초·중·고교를 잇는 육성시스템을 도입한다는 건 축구 선진국에서나 하는 먼 나라 얘기였다. 당장 효과를 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포항은 미래를 보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많은 유망주가 포항을 거쳐 가며 선수육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다른 구단 감독과 축구협회 행정가로 활동하다가 2016시즌 말미에 친정팀 포항으로 돌아온 최 감독은 강등 위기의 팀을 구했고, 지난해 7위, 올해 상위스플릿에 안착시켰다. 현재 K리그1 4위로 내년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출전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는 최근 재계약했다. 구단은 포항의 전통과 정신을 가장 잘 아는 감독이라고 평가한다. 그건 아마도 유스시스템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박 회장의 철학이 뿌리내리는데 최 감독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스시스템을 통해 인적 자원 육성은 물론이고 구단 행정과 소통을 원활히 해 구단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게 내 역할”이라는 최 감독의 말에서 박 회장의 향기가 느껴진다.

최 감독 재계약을 통해 박 회장의 모습을 떠올린 건 육성이라는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인연 때문이다. 속도는 조금 느려도 방향은 올바르게 가고 있는 포항이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체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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