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인터뷰①] 조준호가 밝힌 #유도 입문기 #동메달 #지도자의 길

입력 2017-11-17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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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복을 입었을 때 가장 빛나는 조준호 코치. 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강호동 안정환 서장훈을 이을 예능 대세, ‘갓준호’(축! 돌준호 탈출) 조준호를 만났습니다. 조준호 하면 뭐다?! 바로 ‘유도’죠. 꼬꼬마시절부터 ‘유도 길’만 걸은 그는 국가대표와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의 영광을 안고 현재 유도코치(a.k.a.조관장)로 활동 중입니다. 판교에서 유도장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혼자산다’ 조준호 편에도 나왔던 판교 유도장으로 향한 동아닷컴. 남사친 콘셉트 대리 실현을 위해 독자 대신 유도복을 입었습니다(이때만 해도 웃고 있었다죠). 낙법 업어치기와 안다리걸기를 시작으로 각종 호신술을 속성으로 배웠습니다. 몇 분 만에 머리 산발+땀 뻘뻘. 스트레칭 할 때는 유도장에 누군가의 비명이 울렸다는 후문입니다.

태권도와 합기도보다는 우리에게 덜 친근했던 유도. 하지만 직접 체험해보니 일상생활에 유용한 기술이 많아 매력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조준호는 특히 낙법을 배워두면 길을 걷다 넘어져도 머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도 전도사’ 조준호와 해 질 때까지 나눈 유도 이야기 시작해볼까요? ‘스타 매력 대방출’ 프로젝트(부제-들어올 땐 네 맘이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오늘의 남사친 조준호와 나눈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해당 기사는 친구 사이의 수다 콘셉트에 따라 반말로 작성됐습니다).

정희연 기자(이하 정 기자) : 안녕 준호야~ 어떻게 지냈어?

조준호 : 유도장을 운영하면서 용인대학교 코치로 선수들도 가르치고 있어. 쳇바퀴 돌아가듯 바쁘게 살고 있지. 방송 출연 제안이 들어오면 한 번씩 하고 있고.

김민경 기자(이하 김 기자) : 그래. 요즘 예능에 많이 나오더라. 예능에 대해서는 [남사친 인터뷰②]에서 나누기로 하고 유도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언제 유도를 시작했어?

조준호 :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태권도 검도 등 반에서 친한 친구가 하는 운동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졸랐어. 하지만 어머니는 ‘운동은 안 된다. 공부가 인생에서 제일 쉽다’면서 안 된다고 하셨어.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딱히 공부에 두각도 안 드러내는 것 같고 운동신경은 있어 보이니 ‘운동을 할 거면 유도를 해라’고 허락하셨어. 그렇게 취미로 유도를 시작하게 됐지.

정 기자 : 반대에서 찬성으로 마음을 바꾸신 이유가 뭘까?

조준호 : 아버지가 과거 유도를 하셨거든. 선수 활동도 잠깐 했을 정도로 아마추어 시합에서 성적이 좋았던 분이야. 운동이 힘든 길인 것은 알지만 우리가 워낙 좋아하니까. 나도 그때는 취미로 시작한 게 올림픽까지 갈 줄 몰랐지.

시작하기 전, 유도 띠를 매주는 다정한 조 코치. 쏘스윗. 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정 기자 : ‘유도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까.

조준호 : 유도를 하면서 재밌었던 순간은 딱 두 번 있었어. 시작하고 6개월 만에 처음 나갔던 부산시장배 쟁탈전과 올림픽 때. 내가 유도에 눈을 뜬 순간들이지.

처음 간 유도장이 수준 높은 사범이 있는 도장이었어. 2~3개월 만에 업어치기를 배웠어. 흰 띠인가 노란 띠였던 당시 다른 도장 관장이 데려온 친구와 대결을 붙었어.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는데 상대를 업어치기로 내 키를 넘겨서 던졌지. 내가 사람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쾌감이었어. 야구선수가 첫 구에 배트를 가져다 댔는데 홈런을 친 느낌이랄까. 잭팟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사범님이 그 시합 때문에 기술을 가르쳐준 거였어. 원래 그렇게 빨리 기술을 가르치진 않거든.

김 기자 : 진짜 뿌듯했겠다. 그 다음이 결정적인 ‘쟁탈전’이구나.

조준호 : 당시 4강전에서 동생이 한 선수에게 졌는데 내가 결승에서 그 선수를 이긴 거야. 내가 5학년이었데도 체급을 뛰어넘어서 6학년을 이기고 우승했지. 인생에 있어서 첫 토너먼트 우승이라 기억이 남달라. 왠지 동생의 복수전을 한 것 같아서 더 기뻤어. 한계 이상의 체력을 써서 토할 것 같이 힘든데 묘하게 강렬한 쾌감을 느꼈어. 엔도르핀 과다로 인한 희열이었던 것 같아.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우승을 많이 해봤지만 그때처럼 기뻤던 적은 없어.

김 기자 : 그렇게 용인대를 거쳐 국가대표로 태릉에도 입성했어. 피 나는 노력이 있었겠지.

조준호 : 중학교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힘이 좋으니까 그냥 잘했어. 고등학교 때는 비슷해지더라. 체중이 늘어서 체급을 올렸는데 해당 체급에서는 내가 약한 편이더라고. 그래도 대학교에 가야 하니까 꾸역꾸역 운동했지.

그렇게 목표는 이뤘는데 용인대학교는 전국에서 유도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잖아. 어느 정도 비슷하면 노력해서 경쟁할 텐데 상대도 안 되더라고. 나는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 발톱의 때 같은 수준이었던 거야. 끈 떨어진 연처럼 목표를 못 잡고 있었지. 장남이고 부모님의 기대도 있으니까 또 꾸역꾸역 했지. 누군가가 ‘인생은 버티기’라는데 진짜 내게도 그 시간은 버티기였어. 대학교 시절 유도가 재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몸치도 조 코치의 리액션과 함께라면 ‘유단자 포스’를 뿜을 수 있습니다. 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정 기자 : 상심이 컸겠다. 어떻게 전화위복해서 태릉에 들어간 거야?

조준호 : 집에서 한 달에 3~5만원 용돈을 받았는데 턱없이 부족했어. 학식이 너무 부실하니까 친구들은 밤에 치킨을 시켜먹는데 나는 돈이 없으니 정수기 물로 배를 채우곤 했어. 처음에야 ‘한입만’ 했지만 몇 달 하니까 스스로가 너무 구질구질하더라고. ‘유도를 그만두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나 헤어 디자이너를 해볼까. 공장에 갈까. 이제는 진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나’ 고민이 많은 때였어.

그 시기에 태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태릉에 들어가면 하루 일당이 3만원이라는 거야. 11월에 대표선발전이 열린다는 이야기와 함께. 실력은 국가대표를 생각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워낙 궁핍하니까 ‘이것만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나갔어. 운 좋게도 당시 다른 큰 시합이 많아서 많이들 빠졌더라고. 선발전에서 2등하면서 국가대표가 됐지. 정말 기분 좋았어.

김 기자 : 꿈꾸던 태릉에 입성했어. 어땠어?

조준호 : 정~말 좋았어.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밥도 주는데 심지어 맛있어. 내 꿈은 ‘운동을 그만둘 때까지 여기를 안 나가는 것’이 됐지. 그런데 태릉에서 생활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다보니 국제대회만 나가면 첫 판에 지는 거야. 당연한 결과였지. 유도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전혀 안 했고. 3~4년이 지나니까 선배들의 무시와 멸시가 이어졌어.

김 기자 : 모욕감이 정말 컸겠다.

조준호 : 경종을 울린 건 막냇동생이었어. 명절에 집에 갔는데 초등학생이었던 막내 준휘가 “형아는 왜 한국에서는 잘하면서 외국만 나가면 못해?”라고 하는 거야. 이전에는 어떤 말도 한 귀로 흘려보냈는데 동생에게 들으니까 엄청난 쇼크더라. 그때서야 ‘왜 나는 외국 시합에서 잘 못 할까’ 생각해봤고 쓰는 기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어. 23살에 유도 방식을 다 뜯어 고쳤어. 몇 번을 그만두고 싶고 힘들었지만 꾸역꾸역했지. 그 후로는 국제대회에서도 종종 성적을 내게 됐어.

호신술을 알려주는 조 코치. ‘쫄보’ 기자는 반사적으로 손을 피했다가 혼났습니다. 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정 기자 : 2012 런던 올림픽에 출전도 하게 됐고!

조준호 : 자의반 타의반 버티면서 올림픽까지 갔는데 런던에 도착하는 순간 기분이 정말 좋았어. 장남의 무게, 가족을 대표해야 한다는 부담감 등 나를 옭아맸던 사슬과 족쇄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어. 정말 마음이 편안하더라. 경기를 뛰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니까 시합도 잘 되는 거야. 판정 번복으로 졌을 때 보통 멘탈이 무너져서 패자전에서 시합도 못 하고 지는 선수가 많아. 그런데 나는 이겨도 준결승전이 있고 져도 패자전이 있으니까 ‘내 올림픽이 두 번 남았다’ 싶더라. 즐기니까 즐거웠어.

정 기자 : 경기 중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잖아. 큰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이 감동이었어.

조준호 : 동메달 결정전에서 만난 스페인 선수는 이전에도 붙어본 적 있는 선수였어. 내가 두 번 다 져서 천적 같은 존재였지. 아마 양팔을 다 쓸 수 있었으면 똑같이 졌을 거야. 그런데 한 손 밖에 못 쓰니까 나도 평소와 다르게 경기했고 한 손으로 이겼지. 그때 유도에 다시 새롭게 눈을 떴어.

정 기자 : 초등학교 때에 이어 그 때가 두 번째였구나. 유도에 눈 뜬 순간.

조준호 : 응. 동메달을 따고 도핑 테스트를 하는데 원래 소변이 노란색이잖아. 그런데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혈뇨가 나오더라. ‘한계를 넘어서 죽기 직전까지의 힘을 썼구나’ 싶었어. 한계의 200%를 썼을 지도 몰라.

올림픽 전에 연습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하고 나갔거든. 평소에도 정말 많이 했는데 그 2배 이상을 했어. ‘이렇게 운동하면 다친다’고 주위에서 말릴 정도로. 이렇게 안 하면, 이대로 나가면 메달을 못 따니까. 살아남으면 메달을 따는 거고 다치면 그것도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할 수준을 견디고 살아남았는데 ‘여기까지’구나 싶더라.

정 기자 : 내 한계를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 허탈감이 더 컸을까.

조준호 : 누군가는 한계를 보면 슬프다고 하잖아. 나는 행복했어. 뒤도 안 돌아보고 후련하게 털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됐지.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오는 선수들은 스스로의 끝을 못 봤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시원하고 개운했어.

수업 끝, 스트레칭의 시간. 비명 시작. 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정 기자 : 선수생활을 끝낸 후 지도자가 된 이유도 궁금해.

조준호 : 혈뇨를 볼 만큼 한계를 찍었는데 내가 왜 그때 안 죽었을까 생각해봤어. 어쩌면 내 마지막 힘을 ‘깨끗한 지도자’의 길에 쓰라고 신이 살려놓은 게 아닌가 싶었어. 선수시절 부당한 일을 많이 봤기에 나는 꼭 올바른 선생이 되어야 겠다 다짐했지.

리우 올림픽 여자 대표님 코치를 하면서도 ‘유도 비기너’들을 위한 지도도 하고 싶었어. 일본은 좋은 지도자들이 각 층에 분포돼 있어서 어릴 때부터 제대로 유도를 배울 수 있어. 그런데 우리나라는 실업팀 등 엘리트체육 쪽에만 몰려 있거든.

정 기자 : 그래서 유도장을 차린 거구나. 네가 방송에서 여러 번 말했던 ‘한명의 슈퍼스타보다 많은 사람이 스케이트를 신기 원한다’는 네덜란드 스케이트 국대 코치의 명언이 떠오른다.

조준호 : 한국은 스포츠 강국이잖아. 하지만 실상은 올림픽 메달을 따는 ‘기계’를 만드는 태릉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슈퍼스타가 탄생하지. 아주 작은 풀 안에서는 한 명의 슈퍼스타를 탄생시키려면 선수를 얼마나 채찍질해야겠어. 라이벌도 없잖아. 라이벌은 최고의 스승인데 말야. 이런 도축 체제는 끝이 뻔해. 해결 방법은 간단해. 운동의 풀이 넓어지면 스타는 저절로 나와. 빙상 강국 네덜란드에서는 4-5세부터 스케이트를 신는다더라고.

코치로서 엘리트체육 선수들이 메달을 따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장에서 140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 중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내가 겪고 배운 것 중에 좋은 것만 가르쳐서 아이들이 즐겁게 유도를 하게 해주고 싶어.

김 기자 : 유도장에 아이들이 신나게 유도하고 뛰노는 모습이 인상적이더라. 운영하면서 힘들진 않아?

조준호 : 일단 차리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겠지 했는데 세상이 만만치 않더라. 그냥 잘 되는 건 하나도 없는 거였어. 마케팅도 중요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잘 구성해야 하더라고. 처음부터 다 배웠어. 유도장을 운영하면서 인생을 배웠지.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동아닷컴 김민경 인턴기자 star@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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