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인터뷰] 두산 김태룡 단장의 나의 삶, 나의 야구

입력 2016-06-10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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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김태룡 단장은 야구계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던 ‘흙수저 인생’이지만, 묵묵히 노력하며 대기업 전무에 오르는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김 단장(가운데)이 소속 선수인 양의지(왼쪽), 장원준(오른쪽)과 함께 웃고 있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 실패한 야구선수→계약직 직원→프로야구 매니저→대기업 전무

롯데 훈련보조 7년-무역상-두산 입사
사생활 없이 매니저 8년 후 운영팀장
날 지탱한 건 ‘내 인생은 여기’란 믿음
매니저·운영팀장·단장으로 우승 경험
나만 고생했나요? 혼자서 된 일 아니죠

최근 전무로 승진한 두산 김태룡(57) 단장은 눌변이다. 그러나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의 궤적으로 평가받아야 온당하다. 타고난 재능도 없었고, ‘흙수저’였던 김 단장이 어떻게 야구인 출신으로 대기업 전무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성공의 단서들은 김 단장의 삶 자체에 담겨있다.


● 야구는 나의 ‘솔잎’

김 단장은 스스로를 “실패한 야구선수”라고 말한다. 부산 동아대 2학년 때, 훈련을 잘못해서 어깨를 다치며 선수인생이 하루아침에 끝났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꿈에 야구공이 나타날 정도로 아쉬움이 사무쳤다. 그러나 당시 의술로 회복은 불가능했다. 프로 지명은 고사하고, 대학 야구부에 더 이상 있을 이유도 없었다. 사람은 바닥에 떨어졌을 때,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다. 선수로서 ‘쓸모없어진’ 그를 주위 사람들이 챙겨주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대 강병철 감독은 야구부 퇴단이 아니라 매니저 겸 훈련보조로 김 단장을 썼다. 그 덕분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1983년 강 감독이 롯데 코치로 부임하며 또 따라갔다. 계약직 직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덕아웃 기록을 비롯해 원정기록, 훈련보조, 티켓판매, 가이드북 제작, 예비군 관리까지 시키는 일은 다했다. 그렇게 7년을 일했다. ‘살아남는 것’ 이외의 생각은 사치였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왔다. 야구단 일만 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사표를 냈다. 송별회까지 끝냈다. 그런데 당시 롯데 사장이 불러 ‘정직원을 시켜줄 테니 번복해 달라’고 청했다. 고마웠지만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내일 서울 갈 새마을 기차표까지 샀습니다.” 그리고 나왔다.

부산고 1년 선배가 서울에서 원단 무역상을 하고 있었는데 받아준다고 하니까 무작정 상경했다. 결혼해 아이까지 있었던 처지였다. 주변에서 다 반대했는데 혼자 결정하고 올라갔다.

1년 가까이 야구 밖에서 살았다. 원단 샘플 들고 디자이너 만나 영업하느라 밤까지 술 마시는 나날이었다. 야구장 밖은 추웠다. 원형탈모증까지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OB(현 두산) 야구단 직원들이 찾아왔다. 사무실에 가니까 다짜고짜 입사지원서를 내밀었다. 야구와 재회하느냐의 갈림길, 김 단장은 이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솔잎 냄새가 맡고 싶어지더라고. 그 자리에서 지원서를 썼어요. (송충이가) 솔잎 갉아먹는 일 하면 마음은 편할 것 같더라고.” 1990년 7월21일이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러 김 단장은 이제 야구계 만인이 선망하는 자리로 올라갔다.


“나는 야구와 결혼했다”

'야구기술자' 김태룡의 네버엔딩스토리


● 내 인생은 ‘여기’다

두산에서 김 단장의 첫 보직은 1루 박스 티켓 관리 업무였다. 선수들 전지훈련 가방 제작도 했다.중간에 들어왔으니 시키는 일은 다할 각오였다. 그러다 당시 이재우 감독이 부임하며 매니저로 발령이 났다. 감독 매니저는 사생활을 포기해야 될 자리다. 경창호 당시 단장은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네가 해라. 2년만 하면 바꿔줄게”라고 했다. 그렇게 맡은 매니저를 8년을 했다. 지금처럼 프런트업무가 분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홍보, 캠프 지원업무까지 맡았다. 독학으로 익힌 일본어 덕분에 쓰쿠미 캠프 세팅을 도왔다. 무작정 오사카 사무실을찾아가서 긴테쓰(현 오릭스)와 연습경기도 따냈다. “조직이 필요하니까 그냥 부딪혔다. 롯데 시절 홍문종 김정행 등 재일교포 선수들 있을 때 심부름해주고 광안리에 밥 먹으러 가주고 이러면서 배운
일본어였다.”

매니저 8년을 하니 조직이 운영팀장을 맡겼다.김 단장은 “돌아보면 내 인생은 ‘현장’ 밖에 없었다. 두 아들이 밤에 술 먹고 들어와 드러눕기만 했던 아빠를 많이 그리워했다. 아이들이 직장생활을 하며 이제야 나를 이해해주는 것 같다”고 김 단장은 말했다.

가족까지 포기하며 현장을 지켰다. “야구와 결혼한 것 같다”고 떠올린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은 여기’라는 믿음 덕분이다. 야구 그리고 두산은 인간 김태룡의 ‘존재증명’이었다.


● ‘야구회사’를 다닌다는 의미는?

매니저, 운영팀장, 단장으로서 우승을 세 차례 이룬 김 단장의 화두는 두 가지, ‘두산을 어떻게 영속적인 강팀으로 만들 것인가’와 ‘어떻게 두산에 명문구단의 이미지를 입힐 것인가’다. “명문구단은 프런트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유니폼 입은 현장, 도와주는 프런트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프런트가 현장과 소통하려면 대화의 수준을 맞춰야 한다. 결국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직원들에게 김 단장이 “야구박사가 되라”고 ‘압박’하는 이유다.

바깥에서는 ‘두산 프런트에서 김 단장이 차지하는몫이 크다’는 평가를 한다. 부러움이 섞인 평이겠지만 김 단장의 경험치에 의존하는 것은 두산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김 단장도 “다른 팀은 우리가 잘 나간다 하지만 늘 불안하다. 이 위치에 있으면 나는 늘 책임을 져야 할 마음의 준비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결국 사람을 키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지식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김 단장이 야구단 신입사원이 오면 늘 당부하는 말이 있는데 곧 자신의 성공비결이기도 하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가장 중요하다. 열정이 없으면 다른 일을 알아봐라. 월급쟁이라고 생각하면 야구회사에서 못 버틴다.” 가진 것 없었고, 재능과 운조차 없었지만처지를 불평하지 않았다. 궂은일을 찾아 성실하게 일했고, 겸손하게 살았다. 그런 사람을 두산그룹은 믿고 기회를 줬고, 보상한 것이다.


● 박정원 구단주의 자동차 선물

김 단장은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전무 승진 소식도 마산 원정 때 김승영 사장의 카톡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 정도로 김 사장과 호흡이 잘 맞는다. 마케팅 출신인 김 사장이 운영통 김 단장의 역량을 존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두산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김 단장의 두산 입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우연이 아니었다. 박용민 고문(당시 야구단 사장)이 여러 루트를 통해 김 단장의 평판을 듣고, “그 친구, 데려와 봐”이 한마디를 해줬기에 직원들이 찾아왔던 것이다. 리더의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바꿨고, 조직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셈이다.

김 단장은 전무 승진 뒤, 두산그룹 회장인 박정원 구단주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자동차였다. 그런데 이 차가 흔히 임원이 타는 고급세단이 아니라 RV카였다. ‘출장이 잦은데 공간이 넓은 차로 다니라’는 박 구단주의 배려였다. 야구단의 업무를 세심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조치다. 곧 차가 출고되면 아마 김 단장은 RV카를 타는 유일한 두산그룹 임원이 될 것이다.

그룹 회장의 야구사랑의 혜택을 혼자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 단장은 꽤 마음 쓰이는 듯했다. “내가 공부를 많이 했나, 야구를 잘했나? 야구선수로서 실패한 사람이 프런트 말단직원에서 전무까지 된 것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이고, 야구인들에게도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박정원 회장님이 ‘야구단은 야구기술자가 해야 된다’는 철학으로 단장, 그리고 전무 임명을 해주신 것 같아 늘 감사드린다.” 긴 인터뷰가 끝난 뒤 김 단장은 꼭 기사에 넣어달라며 한마디를 더했다. “나만 고생했나요? 혼자서 된 일이 아니에요.”


● 두산 김태룡 단장은?

▲1959년 부산 출생
▲부산 대연초∼동성중∼부산고∼동아대
▲1983년 롯데 자이언츠 입사
▲1990년 OB베어스 입단
▲2000년 두산 베어스 운영홍보팀장
▲2009년 두산 베어스 이사
▲2011년 두산 베어스
단장(상무)
▲2016년 두산 전무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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