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수촌은 1924년 파리올림픽 ‘오두막집’

입력 2018-02-02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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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파리올림픽 당시 선수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초기엔 대학생 MT처럼 교류하는 분위기
1972년 뮌헨올림픽 테러 이후 보안 강화


올림픽 선수촌(Olympic Village)은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와 임원을 위한 숙소다. 선수들이 경기에 참가하기 편하도록 경기장 주변 혹은 대회가 열리는 도시(Host City)에 위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기 이처럼 익히 알고 있는 올림픽 선수촌은 근대 올림픽을 만든 피에르 쿠베르탕 남작의 아이디어다.

자신의 주도로 근대 올림픽이 출범해 전 세계의 수많은 선수가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좋았는데 대회를 거듭하면서 규모가 커지다보니 참가자들이 편하게 잠자고 먹고 훈련해 경기에 나가도록 해주는 시스템의 등장이 필요해졌다. 그런 목적을 위해 등장한 것이 선수촌이다. 192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8회 하계올림픽 때가 최초 사례다. 그 전까지는 참가선수나 그 나라의 조직위원회에서 각자 알아서 숙소를 구해야 했다. 프랑스 올림픽위원회는 대회를 앞두고 경기장 주변의 적당한 숙소를 임대하려고 했으나 너무 비쌌다. 그래서 아예 대회조직위원회가 주 경기장 주변에 오두막집을 여러 채 지어서 참가선수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1932년 LA올림픽 당시 선수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올림픽 선수촌이 등장한 것은 1932년 LA에서 벌어진 제10회 하계 올림픽부터다. 선수들이 묵는 숙소와 관련 서비스 시설 등이 있는 여러 채의 건물을 지어 각국의 선수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때만 해도 선수촌은 마치 대학생들이 MT에 참가하듯 편안한 분위기에서 서로 교류하고 먹고 자는 곳이었다. 출입도 지금처럼 까다롭지도 않았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 테러리스트가 비극을 만든 것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발생한 이스라엘 선수단 납치테러사건이다. 검은9월단 소속의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습격해서 11명을 인질로 잡았다. 당시 사고로 희생된 사람은 이스라엘 선수 5명과 심판 2명 코칭스태프 4명이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는 대한민국 선수단의 숙소와 가까워 사건현장을 본 사람도 많다. 그 대회에 배구 대표선수로 참가했던 박기원 대한항공 감독은 당시의 사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 대회 이후 선수촌의 보안검색은 엄청 강화됐다. 또 올림픽 대회 기간동안 선수촌에서 거주할 사람의 자격도 강화했다. 오직 선수와 임원 트레이너로 한정했다. 선수촌은 취재진에게 접근 불가지역이다. 그래서 선수촌에서 여러 소문들이 들려와도 알아낼 방법이 많지 않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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