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20년간 주고받은 편지…그것은 사랑이었네

입력 2018-10-15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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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미국 뉴욕의 작가 헬렌 한프와 영국 런던의 중고책방 직원 프랭크 도엘은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 우정을 20년간 이어갔다. 글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 이상의 힘을 보여준다고 영화는 말한다. 사진출처|영화 ‘84번가의 연인’ 캡처

■ 영화 ‘84번가의 연인’

옛날 늙은 신하에게 띄운 왕의 편지
전쟁통 서로 위로하는 남녀의 편지
편지, 이보다 따뜻한 대화가 있을까


“We fell in love.”(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9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을(incredible), 굉장한(magnificient), 역사적(historic), 아름다운 예술작품(piece of art)” 등 극찬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거듭된 수사로써 찬사를 보낸 대상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받은 친서였다. 그리고 김 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며 자랑했다.

김 위원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모두 네 차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실무협상 과정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친서는 막혔던 협상의 통로를 뚫는 구실을 하곤 했다.

중고책방 마크스의 직원 프랭크 도엘을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 사진출처|영화 ‘84번가의 연인’ 캡처


● 안부를 묻고 근황을 전하다

친서는 말 그대로 보내는 이가 직접 쓴 편지다. 편지를 즐겨 쓴 지도자는 또 있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정조가 “글쓰기를 아주 좋아한 사람”이어서 세손 시절부터 조정의 주요한 신하와 가까운 친족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설명한다. 특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심환지에게 무려 297통의 편지를 보냈다. 임금이 쓴 편지, ‘어찰’이다.

안 교수는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을 묶은 ‘정조어찰첩’을 분석한 책 ‘정조의 비밀편지’에서 이를 “절대 군주인 국왕이 현직 최고위직 관리에게 수년간에 걸쳐 비밀스럽게 국정을 지시하고 조율한 극비의 편지”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관련 내용은 정치 현안 논의 67건, 인사 문제 54건, 상소문 41건, 정계 여론 동향 31건 등에 달한다.

심환지는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것으로부터 그의 재임 시절까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견제했던 것으로 알려진 노론벽파의 대표적 인물. 그런 심환지에게 적지 않은 비밀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정조가 그만큼 “막후에서 비밀스런 지시와 조정을 주도하는 노련한 정치인”이었음을 말해준다고 안 교수는 가리켰다.

그렇다고 정조가 정사만을 편지에 쓴 것은 아니었다.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은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갔었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신하의 건강과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군주의 마음이 한껏 묻어난다. 정조는 여기에 “이렇게 사람을 보내 모과를 보내니 아름다운 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정조가 이처럼 편지에 “의문을 나타내는 耶(야)자를 흔하게 사용했다”면서 이는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어투가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묻는 어투이다. 수신자의 처지에서 경쾌하여 부담스럽지 않다”고 밝혔다. 또 정조는 의성어인 “呵呵(껄껄)처럼 친근하고 가벼운 표현”을 흔히 사용해 “인간적이고 유쾌한” 면모를 드러냈다. 심환지에게 보낸 내용 중 자신과 신하의 개인사나 성격과 건강 등을 담은 이야기도 52편에 이르러 정조가 단순히 정적을 다스리고자 어찰을 쓴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 교수에 따르면, 결국 정조는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기본”으로서 편지의 기능을 버리지 않았다. 받는 이의 안부를 묻고, 쓰고 보내는 이가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편지에는 그래서 마땅히 인간적 진정함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

영화 ‘84번가의 연인’의 한 장면. 사진출처|영화 ‘84번가의 연인’ 캡처


● 꿈을 깔아놓은 편지

“저편을 움직여놓을 것. ….(중략) 써가지고 그 사연이 넉넉히 자기가 필요한 만치 저쪽을 움직일 힘이 있나 없나 읽어보고, 없으면 얼마든지 그런 힘이 생기도록 고쳐 써야 한다.”

‘가마귀’와 같은 작품으로 김유정, 김동인 등과 함께 우리 문학사의 또 다른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로 꼽히는 이태준이 밝힌 “편지 쓰는 요령” 가운데 하나다. 다양하고 풍부한 인용문과 예문, 이에 관한 쉽고 명료한 설명 등을 통해 문장작법에 관해 밝혀 놓은 고전 ‘문장강화’에서 이태준은 “무슨 편지나 저편을 움직여놓아야 한다”면서 “문안편지라도 저쪽에서 받고 무슨 자극이 있어야지, 심상히 왔나보다 하고 접어놓게 되면 헛한 편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편지도 표현이니 쓰는 사람이 더 잘 드러날수록 좋은 편지임에 틀림없다”고 알려준다.

1949년 미국 뉴욕의 작가 헬렌 한프와 저 멀리 영국 런던의 중고책방인 마크스의 직원 프랭크 도엘은, 이태준의 설명처럼, 서로 받는 이, 즉 “저편을 움직여놓”았다. 책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닌 헬렌이 쉽게 찾지 못하는 오래된 옛 책을 구하기 위해 프랭크의 중고책방에 보낸 한 장의 편지로부터 교감은 시작됐다. 두 사람은 책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자신들의 소소한 일상까지 글로써 나눴다.

전쟁이 끝나고 고기와 햄과 소시지 등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런던의 궁핍함 속에서도 프랭크는 자신의 진정을 다해 헬렌의 안부를 물었다. 헬렌은 그런 프랭크에게 고기와 햄과 소시지 등을 소포로 건네고, 뉴욕에서 살아가는 세세한 일상의 근황을 전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처지와 상황, 환경을 이해해가며 우정을 쌓았다.

무려 20년 동안 이어진 우정 끝에서 프랭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늙었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다”며 회한에 젖는다. 그런 프랭크에게 헬렌은 “그래도 우린 아직 살아있잖느냐”며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프랭크는 1968년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기에 프랭크는 “자신의 해박함을 두루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고, “굉장히 사려 깊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고 직후 날아든 수많은 애도 편지가 그 방증이었다. 하지만 헬렌과 나눈 편지야말로 이들이 가장 인간적인 배려로써 서로에게 다가갔음을 말해준다.

“내게 황금빛과 은빛이 드리워진 / 천상의 자수천이 있다면 / 세상이 모든 빛을 담아 푸르고 희미한 / 그 자수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주겠지만 / 내게 남은 건 꿈 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아줄 것이니 / 부디 내 꿈을 사뿐히 밟아주소서.”

프랭크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천상의 옷’을 편지로써 헬렌에게 읽어주었다. 비록 가난해 가진 것은 꿈뿐이지만, 그마저도 “저편”과 나누려는 따스한 사랑이었으리라.

가을, 편지 한 장 써 보내야겠다. 비록 따스한 사랑이 아니더라도,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한 장으로는 안부를 물으며 근황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끼적거림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남겨 놓은 또 한 장의 흔적을 남몰래 홀로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느 노랫말처럼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었으면 더욱 좋겠다.

영화 ‘84번가의 연인’의 한 장면. 사진출처|영화 ‘84번가의 연인’ 캡처


■ 영화 ‘84번가의 연인’은?

미국의 작가 헬렌 한프가 쓴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원작 삼은 작품. 그는 1949년 옛 책을 구하기 위해 영국 런던의 채링 크로스 84번가의 중고서점 마크스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과 이후 2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나눈 두 사람의 우정 혹은 사랑의 교감을 그린, 실화 영화다. 데이빗 휴 존스 감독 연출로 앤 밴크로프트와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1987년 작품이다. 이제 레스토랑이 들어선 채링크로스 84번가에는 마크스 서점이 있었다는 동판이 남았다고 한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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