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령희’로 칸 찾은 신인 감독과 배우 ‘4인4색’

입력 2019-05-24 18: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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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학생 단편 부문인 시네파운데이션에서 영화 ‘령희’를 선보인 주역들. 왼쪽부터 출연 배우인 우상기, 이경화, 한지원 그리고 연출을 맡은 연제광 감독. 칸(프랑스)|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칸 국제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이나 배우 송강호처럼 한국영화를 이끄는 영화인들만 찾는 곳이 아니다. 이제 막 영화의 세계로 들어선 신예들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무대로도 통한다. 칸 국제영화제가 학생 단편을 소개하는 공식부문인 ‘시네파운데이션’에 유독 관심을 쏟는 이유다.

올해 시네파운데이션에 초청된 한국영화는 연제광 감독의 ‘령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한 1990년생의 신인감독은 졸업 작품으로 완성한 ‘령희’를 칸에서 처음 선보이게 된 상황에 “에너지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15분 분량의 단편인 ‘령희’는 어느 지방의 작은 제조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중국 동포인 령희가 불법 체류 단속반의 추적을 피해 추락사한 뒤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우리 사회 불법 체류자의 현실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아직 장편영화 연출 데뷔를 하지 않은 연제광 감독은 칸의 초청장을 받은 뒤 ‘령희’에 출연한 배우 3명과 동행해 칸 국제영화제를 경험하고 있다. 주인공 홍매 역의 한지원(23), 영화를 상징하는 인물 령희 역을 맡은 이경화(30), 그리고 극의 무대인 제조공장 실장 역의 우상기(34)다.

언젠가 장편영화를 갖고 다시 칸 국제영화제를 찾는 날을 기다리는 이들 네 명을 칸에서 만났다.


● 감독 연제광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스타일로”

연제광 감독은 불법 체류자의 죽음, 이를 은폐하려는 고용주의 모습을 구상한 건 외갓집이 있는 충청북도 괴산을 오가면서라고 했다.

“몇 년 전 외갓집에 갔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더라고요. 그들의 모습이 인상에 남았고 졸업 작품을 구상하다가 그때의 잔상이 떠올라 외국인 노동자 이야기를 완성하게 됐어요.”

‘령희’의 영어제목은 외계인 혹은 이질적인 존재를 뜻하는 ‘에이리언’(alien)이다. “령희는 ‘령희’라는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뭔지도 잘 모르는” 설정 아래 감독이 정한 영어 제목이다.

“‘에이리언’은 불법 체류자라는 사적전인 의미도 있어요. 몇 년 전 뉴스에서 접한 실제 사건도 저한테 영향을 줬죠. 어떤 불법 체류자가 단속을 피하려다가 죽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단속이 계속됐다는 내용이었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최소한의 인간성조차 지켜지지 않은 거죠.”

단편이고 졸업 작품으로 완성한 영화인만큼 촬영 상황은 넉넉하지 않았다. 연제광 감독은 평소 단편작업을 같이해온 연기자 한지원에 출연을 제안했고, 한예종 진학 전 처음으로 영화를 배운 상명대학교 동기인 이경화, 우상기와도 힘을 합쳤다.

“영화에 나오는 홍매와 령희의 방은 어릴 때 외할아버지께서 하신 양조장 창고를 조금 바꿔서 찍었고, 공장도 외삼촌이 진짜 운영하고 있는 곳이에요.(웃음) 외갓집 주변에서 촬영했는데 어릴 때부터 자주 다닌 곳이라 익숙해요. 어떤 면으로 보면 외할아버지를 향한 추억을 담은, 제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연제광 감독은 현재 장편 데뷔작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영화 제작사와 만나 시나리오를 함께 개발하는 상황.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청년의 이야기”라고 한다.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은 ‘서울의 밤’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작업하고 있다.

연제광 감독은 “어떤 주제를 꾸준히 파고들기보다 제가 처한 시기와 상황에 맞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영화 ‘령희’.


● 한지원 “버티다 보면 기회는 온다”

한지원은 올해 2월 한예종을 졸업하고 이제 막 영화계에 발을 디딘 신인이다. 여러 단편영화 작업을 해오면서 경험을 쌓은 그는 연제광 감독의 앞선 단편 ‘표류’에 이어 ‘령희’의 주연까지 맡았다. 중국 동포이자 불법 체류자인 홍매 역이다.

대학 선후배 사이이기도 한 연제광 감독은 한지원을 두고 “아무 전형적인 표현일 수밖에 없지만 스케치북처럼 전형성이 없는 모습이 매력적인 연기자”라고 했다.

한지원은 대학을 졸업한 지금 본격적으로 상업영화나 드라마 오디션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령희’처럼 자신의 재능을 보일 수 있는 단편영화 작업도 꾸준히 잇는다.

“단편 작업을 하다보니 칸까지 오는 기회를 얻었어요. 버티고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가 온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한지원은 자신의 오빠가 연극영화과에서 공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렴풋이 연기자의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해온 그는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니 연기는 어떻겠느냐”는 부모님의 권유까지 받아 한예종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대학 입시로 연기를 시작해서인지” 딱히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하지만 입학하고 연극 경험을 쌓아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2, 3학년 때부터는 단편영화 작업도 하니까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점점 재미있어졌고요. 앞으로 계속 하고 싶은 작업이에요. 오디션에 떨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해야죠. 하하!”


● 우상기 “배우 꿈 이어가는 과정”

불법 체류 노동자의 죽음이 은폐되는 제조공장의 실무자 역을 맡은 우상기는 ‘령희’ 팀에서 가장 연장자다. 연기할 기회가 오길 기다릴 수만은 없는 나이. 계속 문을 두드리는 동시에 그는 ‘생활인’으로서도 삶을 이어가고 있다.

“단편영화 작업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생계유지를 해야 하니까 요즘은 요리도 하고 있어요.(웃음) 홍대에 있는 식당에서 오코노미야키를 만들죠.”

개성 강한 외모만큼이나 그는 다양한 경험을 축적해 이를 연기로 풀어낸다. 처음 대학에 진학할 때는 미술을 전공했다. 자연스럽게 영화 미술에도 관심이 생겼다. 영화 ‘아저씨’의 소품팀 스태프로 경험을 쌓았고, ‘범죄의 여왕’에선 인물 조감독으로 현장을 겪었다.

“스태프로 일하다 보니 배우가 연기하는 것에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어떤 상황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어요. 연기가 제 적성이라고 할 순 없지만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스스로 ‘이게 내 길’이라고 여기면서요.”

우상기는 칸 국제영화제에서 누구보다 큰 에너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칸에 와서 딱 한마디밖에 생각나지 않아요. 연기하길 잘했다!”

영화 ‘령희’.


● 이경화 “어릴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

이경화는 ‘령희’를 상징하는 배우다. 출연 분량은 한지원에 비해 적지만 처절한 죽음을 통해 불법 체류자가 놓인 비극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임을 맡는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는 그는 “령희가 처한 극한의 상황이 마치 내 일인듯 다가왔다”고 했다. 단편이고, 출연하는 장면도 적지만 그는 연제광 감독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인물을 완성했다고 돌이켰다.

이경화는 “대학에 들어가고 연기 작업을 하면서 여러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도 했다.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는 일이 배우가 가져야 할 시선이라는 생각도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칸 영화제까지 오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길까’ 싶을 정도로 감사해요. 뤼미에르 극장에서 테런스 맬릭 감독의 ‘어 히든 라이프’를 봤는데 정말 감격스러웠죠.”

이경화는 꾸준히 연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인생과 삶이 쉽지 않잖아요. 함께 공감하면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칸(프랑스)|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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