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 수위는 가해자가 결정? 피해자는 다 ‘포기’할 각오, 가해자는 잔여시즌 ‘포기’

입력 2021-02-22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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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열 감독. 스포츠동아DB

기억을 꺼내는 자체가 고통이었지만 용기를 냈다. 자신이 쌓아온, 그리고 쌓아갈 모든 것들을 포기하겠다는 각오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했다. 피해자의 용기에 가해자가 내놓은 답은 고작 잔여 6경기 포기였다. V리그를 넘어 사회를 뒤덮은 폭력 논란, 왜 징계 수위는 가해자가 정하는 것일까.

박철우(36·한국전력)는 18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도드람 2020~2021 V리그’ 남자부 5라운드 OK금융그룹과 원정경기 직후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56)을 향해 작심발언을 했다. 박철우는 12년 전 국가대표팀에서 당시 이상열 코치에게 폭행을 당한 피해자다. 17일 이 감독이 “난 (폭력) 경험자라 선수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 중이다. (중략) 어떤 일이든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게 발단이었다. 박철우는 “그 기사를 보고 하루 종일 손이 떨렸다”며 “몇몇은 기절하고 몇몇은 고막이 나갔다. 그들이 내 동기고 친구다. 그게 과연 한 번의 실수인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사랑의 매도 어느 정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감독은 “박철우와 소주 한 잔 하면서 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박철우는 이 감독과 코트 위에서 잠시 마주치는 것도 불편하다고 했다. 오히려 “사과 안 하셔도 된다. 보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박철우에게는 이 감독과 만남 자체가 2차 가해로 다가올 것이다.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20일 KB손해보험은 “이 감독이 잔여시즌 경기 지휘를 자진 포기했다”고 밝혔다. 21일 OK금융그룹전을 포함해 6경기가 남은 시점에서다. KB손해보험은 다음 시즌 이 감독의 거취는 물론 자진 포기한 올 시즌 남은 기간의 급여 지급 등에 대해선 논의 중이라는 입장을 덧붙였다.

이 감독에 앞서 학교폭력 전력이 드러난 송명근(28·OK금융그룹)도 잔여시즌을 ‘자진’ 포기했다. 송명근의 경우 5라운드 막바지, 이 감독은 6라운드만을 남겨둔 시점에서였다. 징계 수위 자체도 도마에 오르고 있지만, 이를 떠나 왜 가해자가 스스로의 징계를 결정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일고 있다.

물론 대한배구협회나 한국배구연맹(KOVO)에 이런 폭력 사태에 대한 매뉴얼은 없다. 초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흥국생명은 이재영-다영 쌍둥이에게 무기한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다. “모든 일이 해결돼야 복귀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만큼 품위손상 징계를 선제적으로 내린 이 같은 사례는 프로야구를 포함한 타 종목에도 여럿 있다.

박철우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분명히 (내게) 안 좋은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다. “이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면돌파하는 게 맞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인데, 가해자는 과연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 것일까.

최익래 기자 ing1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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