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연구한다면서 탈북민은 없는 통일연구원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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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22일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장하는 김일성 뒤로 착잡한 표정의 김구가 뒤따르고 있다. 동아일보DB
1948년 4월 22일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장하는 김일성 뒤로 착잡한 표정의 김구가 뒤따르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에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평양에 가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수립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는 들러리만 설 것이라는 여론을 향해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의가 없지 않으나,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만약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미소 양군 철수, 남북 요인 회담,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 같은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했는데도 가지 않으면 그 또한 북한에 명분을 주는 일이다.

김구는 “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되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며 2년 뒤 일어날 동족 상잔의 비극까지 예언했다. 그러나 평양에 간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겐 역사를 바꿀 힘이 없었다. 강대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이상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껍데기를 붙잡고 있다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코너로 몰린 것이다.

역사는 냉정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통일은 한쪽이 사라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으로도 소멸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지금도 분단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이런 교훈을 배우기나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우리는 이룰 수 없는 이상을 통일방안으로 내세우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약 30년 전에 발표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노예제, 봉건제, 군국주의, 독재, 세습 등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했던 온갖 나쁜 것들만 모아 만든 듯한 돌연변이 북한과 협상을 통해 합쳐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북한이 수용할 리 없고, 우리는 더욱 그럴 수 없다. 통일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쪽이 소멸돼야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게 개인적 소신이다.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어느 영역에 있어서든 북한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강하다. 북한에게 배워야 할 것은 없다. 통일은 사실상 흡수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시점은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는 때이다. 그것이 바로 냉혹한 역사가 앞으로 보여줄 필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통일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이건 우리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통일을 연구하는 공식 조직은 통일연구원이다. 박사급 연구원 40명에 석사급 보조연구원 20명이 있다. 그런데 이런 통일연구원이 있음에도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통일부에 ‘통일미래기획위원회’를 또 출범시켰다.

위원회는 ‘중장기 통일구상과 전략방향 정립’을 목표로 ‘신통일미래구상’ 초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런 것이야 말로 통일연구원이 해야 하는 일이다. 위원회의 출범은 통일연구원에 사실상 사망 판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의 통일연구원에 신통일미래구상 설계를 맡겨도 될까. 통일연구원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동안 정규직 탈북민 연구원은 없었다. 탈북민 박사는 수십 명이나 되지만, 대다수는 통일연구원에서 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거기는 우리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끌어주며 존재하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연구하는 곳이라면서 ‘먼저 온 통일’이라는 사탕발림 간판을 하사받은 탈북민은 한 명도 없다. 공채로 뽑힌 박사급 인력들의 역량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통일연구원은 보고서 잘 만들고 영어 잘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을 꿰뚫어보고 현실적 대책을 만드는 것이 본질인 곳이다. 실현 가능성 제로인 평화통일 판타지 보고서보다는 굳이 박사가 아니라도 몸으로 북한을 체험한 탈북민의 시각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마침 통일연구원은 내달 윤석열 정부 들어 첫 원장을 맞이한다. 부디 실질적인 통일 연구 중심이라는 본질적 역할을 회복하는 첫 단추가 되길 기대한다. 75년 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추종하다가 진퇴양난의 수모를 당하는 생생한 본보기를 보여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통일연구원#통일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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