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희순은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감정 기복이 큰 캐릭터를 맡아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이뤄냈다. 사진제공 | 매니지먼트 시선

배우 박희순은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감정 기복이 큰 캐릭터를 맡아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이뤄냈다. 사진제공 | 매니지먼트 시선


‘어쩔수가없다’는 다니던 제지회사에서 돌연 해고된 한 가장이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이야기다. 박희순이 맡은 ‘선출’은 주인공 만수(이병헌)의 제거 대상이자, 동시에 만수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이상을 투영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만수의 ‘이상적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만수는 동경해온 선출을 직접 제거하려 결심하면서 딜레마를 겪는다.

박희순은 그동안도 강렬한 존재감과 묵직한 연기로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해왔지만, 이번에는 박찬욱이라는 때로는 비옥하고 때로는 척박한 ‘연출 환경’을 만나 스스로의 연기 스펙트럼을 또 한 번 뛰어넘었다. 비교적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필모그래피 중 가장 인상적인 연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찬욱 작품 캐릭터, 버킷리스트 이뤘다”

박희순은 박찬욱 감독의 오랜 팬이었다. “박 감독님과 함께하는 건 오랜 숙원이자,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어요. 가족들도 다 알 정도라, 어머니 기도 목록엔 언제나 ‘우리 희순이가 박찬욱 영화 찍게 해주세요’가 있었죠. 그래서 가족들끼리는 ‘기도가 통했다’는 농담도 했어요.”

그가 박찬욱을 최고의 감독으로 꼽는 이유는 명확하다. 가장 ‘영화적인 영화’를 만드는 연출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예술 세계는 뭘까?’란 호기심은 그에게 언젠가 꼭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고, 이번 작품을 통해 마침내 실현됐다.

그는 이번 작품을 함께하며 팬심은 더 깊어졌다 말했다. 그는 박찬욱 감독 디렉션의 가장 큰 특징으로 ‘우리말’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꼽았다. 배우가 대사를 실제로 말할 때의 장음·단음, 소리의 운율 같은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며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알리려 노력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해외에 작품이 소개될 땐 자막이 달리니 신경을 덜 쓸 법도 한데 한국 말에 대한 사랑이 굉장히 대단하구나 싶었죠.”

또한 세계적인 감독임에도 외국 관객이 한국 정서에 공감할 수 있을지보다,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느낄지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역시 경외심을 품게 했다. “그게 정말 인상 깊었고 존경심을 더 갖게 됐죠.”
박희순은 이번 작품에서 ‘선출’ 역에 자의적인 해석을 더하기도 했다. 그는 “제 상상력과 감독님의 상상력이 어디서 맞닿을 수 있을지 부딪혀보고 싶었다”며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사진제공 | 매니지먼트 시선

박희순은 이번 작품에서 ‘선출’ 역에 자의적인 해석을 더하기도 했다. 그는 “제 상상력과 감독님의 상상력이 어디서 맞닿을 수 있을지 부딪혀보고 싶었다”며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사진제공 | 매니지먼트 시선

“박찬욱과 내 상상력이 어디서 맞닿을지 부딪혀보고 싶었다”

이번 작품에서 박희순은 선출이라는 인물에 자의적인 해석을 더해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박찬욱은 대본 속 토씨 하나, 뉘앙스 하나도 철저히 검열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박희순의 돌발 표현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그는 “보통 대본에는 배우가 따라가야 할 감정이 지문에 다 나와 있는데 이번 시나리오는 여백이 많았어요. 상상할 여지가 많았죠. 제 상상력과 감독님의 상상력이 어디서 맞닿을 수 있을지 부딪혀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예고편에도 등장한 ‘경악하는 표정’이나 ‘불멍’ 장면에서 외로움에 눈물을 보이는 선출의 모습 등은 모두 그의 자발적인 해석에서 비롯됐다. “대본보다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넣었는데 감독님이 ‘오케이’ 하셨어요. 박찬욱 감독은 철두철미하고 계획적인 분이지만, 배우의 상상력엔 의외로 굉장히 열려 계세요.”

함께 연기한 이병헌에 대한 찬사도 빼놓지 않았다. “제가 돌발적으로 감정을 쏟아낼 때도, 이병헌 배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다 받아주더라고요. 역시 클래스가 다르구나 싶었어요.”

“이병헌이 없어도, 강호 형도 있고 박해일도 있고”

작품 속 ‘고용불안’이라는 주제를 두고 박희순은 자신에게도 대입해봤다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배우들이 일이 없을 땐 쿠팡 배달도 하죠. 저도 배우 일이 끊기면 가장 노릇을 위해 다른 직업을 찾아볼 것 같아요.”

탐나는 배역을 위해 만수처럼 누구를 제거하는 상상도 해봣냐는 물음에는 “해보긴 했다”며 웃었다. “다층적인 내면이 있는 만수 캐릭터, 탐나긴 했죠. 그런데 이병헌 배우를 없앤다고 해서 감독님이 그 자리를 저에게 주시겠어요? (웃음) 강호 형도 있고 박해일도 있는데요.”

박찬욱 감독의 다음 작품에 대한 바람도 털어놨다. “솔직히 기대는 조금 있어요.” 그는 지난 기자간담회에서 “감독님 작품에 또 출연할 수 있다면 발가 벗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당시 박 감독이 조용히 ‘누가 보고 싶다고?’라며 혼잣말한 걸 들었다며 ”협상은 결렬된 것 같지만, 희망은 품고 있습니다”라며 조심스레 기대감을 내비쳤다.


장은지 기자 eun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