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만난사람]아나운서차인태

입력 2009-04-17 15: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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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태
경기대 예술대학에서 영상교수로 재임 중인 전직 아나운서 차인태.
사진=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차인태
차인태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장학퀴즈’

차인태
경기대 예술대학에서 영상교수로 재임 중인 전직 아나운서 차인태.
사진=김종원 기자 won@donga.com

1974년 8월 19일. 안장식의 진행은 엄청나게 늦어지고 있었다. 10시에 시작한 국민장 영결식은 예상시간을 훨씬 넘겼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에 막혀 운구행렬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육영수 여사를 잃은 국민들의 슬픔은 그토록 컸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입구까지 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검정색 여름양복이 없어 결혼식 때 입었던 겨울양복을 입고, 갓 서른의 젊은 아나운서는 8월의 염천 아래에서 중계방송을 하고 있었다. 운구차량이 청와대 정문을 벗어날 즈음 아나운서는 대통령의 눈물을 보았다. 철혈의 대통령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길을 바라보는 일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이틀 뒤에 있었다. “나, 박정희입니다.” 수화기 저쪽에 대통령이 있었다. 당황한 아나운서는 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겨우 한다는 말이 “예, 저 차인태입니다”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차인태 씨, 방송 잘 봤습니다.” 경기대학교 서울 캠퍼스 연구실에서 차인태(65) 교수를 만났다. 차 교수는 1998년부터 경기대 예술대학에서 영상교수로 재임 중이다. 본래 숱이 적었던 머리칼이 눈처럼 하얬다. 브라운관 속의 벼려진 칼날 같던 예민함을 넉넉한 웃음이 대신하고 있었다. 세월은 천하의 차인태 조차 풍화시켰다. 1969년 2월 MBC 아나운서로 시작해 1998년 3월 제주문화방송 대표이사로 퇴임하기까지 30년 간 대한민국의 대표 아나운서로 방송 현장을 지켰던 사람. 그에 대해 ‘한국방송사의 산증인’ 운운하는 일은 결례가 될 것 같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방송사였다. 일평생 그에게는 ‘한국 최고의 아나운서’라는 수식어가 운명처럼 따라 붙었다. 학창 시절 들었던 어느 강의에서 전직 방송프로듀서였던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김동건과 차인태만한 진행자를 본 적이 없다. 이들은 하늘이 내린 사람들이다.” 그 얘기를 했더니 차 교수가 손사래를 친다. “무슨… 그럴 만한 재목이 아니에요. 그 시대가 그런 사람을 요구했던 겁니다.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었던 거지. 만약 지금 나보고 방송국 공채 시험을 보라고 한다면 합격할 자신이 없어요. 하하하!” ‘차인태’하면 ‘장학퀴즈’다. 1973년 2월부터 1990년 4월까지 장장 17년 2개월 동안 그는 장학퀴즈의 진행석을 지켰다. 하지만 장학퀴즈가 첫 방송을 탈 때까지만 해도 이 프로그램이 한국방송사상 최장수 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 오르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차인태는 일요일 저녁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프로권투 중계프로그램 ‘챔피언 스카웃’을 진행하고 있었다. 프로권투는 레슬링과 함께 최고의 ‘노른자’ 프로그램이었다. 차인태 역시 ‘챔피언 스카웃’의 캐스터가 되기 위해 눈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첫 방송이 마지막 방송이 될지도 모르는 ‘땜빵용’ 프로그램을 하라니! 그러나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장학퀴즈는 첫 방송이 나간 지 정확히 3주 만에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얼마 안 가 ‘폭발’을 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정동 MBC 공개홀은 방청을 원하는 인파로 바다를 이뤘다. 요즘에야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눈물 젖은 빵을 씹던 시절이 없을 리 없다. 초보 아나운서 시절, 그는 선배들의 방송 테이프를 필사하며 밤을 낮처럼 보냈다. “요즘처럼 MP3가 있나, 어디서 다운로드를 받을 수가 있나. 릴 테이프 아시죠? 테이프를 둥그렇게 감아 놓은 거. 초짜 때는 선배들이 중계하는 현장에도 쫒아나가지 못하니까 그걸 구해다가 듣는 거지요. 노트를 사가지고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를 전부 받아 적습니다. 그게 다 끝나면 이번에는 테이프를 틀어놓고 소리를 내서 똑같이 따라하는 거예요. 방송국 컴컴한 숙직실에 앉아서 밤새 그걸 하는 거지요.” 당대 최고의 아나운서로 군림했던 임택근, MBC스포츠의 대명사 이철원, 야구의 김용과 박종세(TBC) 등이 주 공부대상이었다. 선배의 권투중계 녹음을 그대로 받아 적은 뒤, 이번엔 자신이 캐스터가 됐다고 가정하고 중계를 했다. 한바탕 신나게 하긴 했는데 시간을 보니 8분이 걸렸다. 권투 한 라운드는 3분이다. 한다고 했지만 선배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하루가 좌절의 밤이었다. - ‘아나운서는 언어운사(言語運士)다’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아나운서는 그 나라 말의 파수꾼이자 스승이다.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뜻으로 한 말입니다. 말이 참 중요하잖아요. 몽고를 보세요.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했지만 결국 말과 글이 없어지니 현재가 얼마나 초라합니까. 아나운서는 메시지를 말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언어를 제대로 쓸 수 없다면 아무리 외모, 지적능력이 뛰어나도 소용이 없지요. 그런 건 ‘다음 카드’입니다.” - 정치권에서 유혹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허허, 많았죠. 모두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나는 정치로 간 사람을 비하하거나 폄하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의지니까. 다만 책임도 본인이 져야지요. 거절할 때는 우스개로 ‘저는 지역구가 없습니다. 통일되면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합니다(그는 평안북도 벽동 출신이다).” 30년 방송인생에 잊지 못할 장면이 없을 리 없다. 그 중 ‘완벽 차인태’를 식은땀 나게 만들었던 에피소드 한 토막. 육영수 여사의 안장식 중계방송을 할 때의 일이다. 당시 안장식은 국방부 차관이 직접 맡아 지휘할 정도로 국가적 중대사건이었다. 각국에서 조문사절이 내한했다.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영부인 이멜다 여사가 직접 대표로 왔다. 이멜다 여사는 서양인처럼 체구가 커 각국 조문단 중에서도 눈에 확 들어왔다. 문제는 가뜩이나 눈에 띄는 이멜다 여사가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는 꽤 ‘패셔너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리고는 다리마저 착 꼬고 앉았다. 이 모습이 TV 영상에 자꾸 비치게 되니 보다 못한 ‘위’에서 말이 내려왔다. 제발 어떻게든 해보라는 얘기였다. 결국 외무부 직원이 ‘총대’를 맸다. 이멜다 여사에게 가서는 눈 딱 감고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조금 있으니 이멜다 여사가 슬그머니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선글라스도 벗어서 핸드백에 넣었다. 차인태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요즘 아나운서들이 지나치게 연예인화 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메인’이냐 ‘서브’냐를 본인이 판단을 잘 해야지요. 본 영역을 지키고 나서 다른 쪽을 하는 건 몰라도, 너무 그런 쪽에만 악센트를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특별히 해주시는 조언이 있다면요? “신인 때, 특히 입사 3~5년차까지는 프로그램이나 장르에 편식을 하지 말고,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많이 해보라고 합니다.” - 후배들이 방송하는 걸 보고 계시면 몸이 근질거리지는 않으십니까? “하하! 그런 건 이제 다 넘어서서. 부장 시절만 해도 그랬지요. 지방출장을 가서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다가 그 자리에 막 전화를 하고 그랬습니다. 아슬아슬한 게 눈에 자꾸 보이고 하니까. 한 프로그램만 들으면 ‘이 친구가 될 성부른 나무구나’ 하고 나름 판단하기도 하고. 지금은요? 그냥 채널을 돌려버리죠.” - 요즘 아나운서들이 실수를 많이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요? “나이에 비해 걸맞은 말씨를 잘 몰라요. 대학생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쓰는 말을 하면 대학생답지 않잖아요. 표현 같은 게 아나운서답지 않으면 거슬리죠. ‘~데요’체도 너무 남발하는 것 같고.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재미를 위해 어쩔 수 없을 때도 있겠지만 유행어 같은 데 너무 민감한 것도 문제고.” - 만약 지금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면 어떤 방송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마이너리티긴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 시니어들이 브라운관 앞에 잘 안 앉아 있어요. TV가 옛날처럼 안방극장 역할을 못 하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결국 10대 취향 프로그램들이 대거 자리 잡게 되고. 방송은 퍼블릭 서비스를 해야지요. 구매력은 좀 떨어지겠지만 우리 사회에 어른으로 남아있는 시니어들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어요. 대담이든, 토크쇼가 됐든. 아! ‘무릎팍도사’같은 건 말고. 안타깝게도 시니어 진행자들이 이제 별로 없어요. 설 자리도 적어졌고.” - 이제 곧 정년이신데,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신가요? “선생님 한 분을 찾아 놨어요. 서예가 하고 싶어. 서예 하시는 분들은 남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수련을 위해 쓰십니다. 나도 그게 크다고 봐요. 이제 정년퇴직하면 인생의 한 챕터가 또 매듭이 지어지겠지요. 이제부터는 좀 더 ‘훌훌’, ‘훨훨’ 살 겁니다. ‘훌훌’과 ‘훨훨’… 이것들이 뭘 수식하는지 알겠지요?” 알 것도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해 전혀 모르겠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차 교수가 책 한 권에 사인을 해 주었다. 또 한 장의 인생 챕터를 마감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가 쓴 책 ‘흔적’은 한국방송의 흔적이자 백열(白熱)하게 살아 온 차인태 개인의 흔적이다. 그의 ‘흔적’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프로필 1944년 평안북도 벽동 태생 1966년 KBS 아나운서 입사 1969년 MBC 아나운서 입사 1989년 문화방송 아나운서실 국장 1995~1998년 제주문화방송 대표이사 1998년~ 경기대학교 교수 2003년 행정자치부 평안북도 지사 2008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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