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전대통령서거] DJ‘고난과역경의삶’…인동초같은삶

입력 2009-08-19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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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택연금…옥고…망명…대권…
55차례 가택연금, 6년여의 옥고, 2차례의 망명, 바다 속에 수장될 뻔했던 위기, 그리고 사형선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인동초(忍冬草)’라는 별칭처럼 쉼 없는 고난과 좌절,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노벨평화상 수상,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을 화해로 이끈 남북정상회담 등도 오랜 세월 역경을 딛고 일궈낸 결과였다.

하의도 섬 소년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세 시간 떨어진 작은 섬 하의도에서 가난한 소작농 김운식(1974년 사망), 장수금(1972년 사망) 부부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그의 어머니는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그를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후 당시로선 전국 10대 명문 중 하나였던 목포상업학교(5년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해운회사(목포상선)에 취업해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목포상선에 다닐 때 친구의 동생이었던 첫 부인(차용애·1954년 사망)에게 줄기차게 구애해 결혼했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한때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가 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했다. 그의 건준 경력은 오랜 세월 색깔론에 시달리는 빌미가 됐다.

망명, 가택 연금

1954년 그는 금배지에 도전한다. 동기는 소박했다. 그는 “6·25를 겪으면서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 진입은 쉽지 않았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다.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을 낳은 첫 부인 차 씨와 사별한 것도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시련 때문이었다.

1961년 5대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그마저도 당선 3일 만에 일어난 5·16 쿠데타로 의원 등록도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정치규제에도 묶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아래서 그는 ‘평생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났고, 1962년 결혼했다.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40대 기수, 고난의 시작

그가 정치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63년 6대 총선 때 전남 목포에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이후 야당 대변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치른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그는 평생의 경쟁자인 김영삼(YS) 후보를 상대로 대역전극을 펼치며 후보로 지명됐다.

그해 7대 대선에서 맞대결을 펼친 상대는 종신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유신체제(1972 년)를 구상하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95만 표 차이의 석패였다. 일본 망명 중이던 1973년 8월 그는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요원들에 납치돼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DJ는 “당시 ‘국민들을 위해 아직 못 다한 일이 많다’며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후 석방과 연금을 되풀이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DJ는 연금해제 및 사면복권 조치를 받았다. 대학가에는 민주화 열망이 넘쳤지만 ‘서울의 봄’은 짧았다.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세력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DJ에게는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사형을 선고했다. DJ는 유언과 다름없는 최후 진술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 정치 보복이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미국 정부의 압력 등으로 무기징역, 징역 20년 등으로 감형됐지만 DJ의 심정은 복잡했다.

1982년 12월 석방된 직후 그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에 있던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는 등 반독재투쟁을 계속했다.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

DJ는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이끌었고 이를 통해 6·29선언을 얻어냈다.

첫 대통령 직선제 첫 대선에서 그는 YS와의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못했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에 나섰다. 결국 야권의 분열로 대선은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착됐다. DJ는 1992년에 다시 대선에 도전했지만 YS에게 패배했다. DJ는 즉각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1994년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한 그는 1995년 6월 지방선거 지원 유세에 참여해 조순 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켰고, 같은 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약속 위반’ ‘야당 분열’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15대 총선 결과(79석)도 신통치 않았다.

대통령 당선, 노벨평화상 수상

네 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DJ의 꿈은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1997년 12월 대선 직전 자민련 김종필(JP) 총재와 ‘DJP 연합’을 성사시켰고, 결국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당선 직후부터 DJ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부도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진력해야 했다.

특유의 의지로 국면을 정면 돌파하면서 IMF 관리체제 조기 극복이라는 성과를 도출해냈다. 경제 위기가 가닥이 잡히자 DJ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하며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했다.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남북 간 대결에서 화해로, 상쟁(相爭)에서 상생(相生)으로 대전환을 이뤄낸 남북정상회담 성사는 2000년 10월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의 임기 말은 불행했다. 게이트 의혹과 두 아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는 치명적 결함으로 작용했다.

자연인 김대중

2003년 2월 24일 퇴임한 그는 재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국민과 같이 나라가 잘 되도록 가능한 정성과 협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만 활동하겠다는 얘기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햇볕정책이 공격당하자 그는 강력히 반박하며 현실정치로 걸어 나왔다. 대선이 치러진 2007년에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쪼개진 당시 범여권의 통합을 주문하는 발언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여전히 민주당의 최대 주주임을 보여줬다.

2009년 5월 23일 후임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하자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의 ‘민주주의 퇴보’를 주장하며 야권통합과 대여(對與)투쟁을 독려했다. 그는 한 평생을 한국 정치와 함께 해 온 ‘정치9단’으로선 부득이한 행보였을 것이란 평가도 있다.

조수진 동아일보 기자 jin0619@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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