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화백“‘창천수호위’,가장이현세다운만화”

입력 2009-08-19 15: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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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만화평론가 박석환은 이현세(55)를 두고 ‘호랑이 눈을 가진 진짜 남자’라고 표현했다.

거친 야성과 광적인 정열로 대변되는 까치는 젊은 날의 이현세였다.

확실히 그에게선 ‘남자’가 느껴진다. ‘쪽’ 팔리는 일을 하지 못한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길 거부한다.

이현세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만화계로서도 최악의 사건이었던 ‘천국의 신화’ 재판도 그의 이러한 성향에 상당 부분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도 나이를 먹는다.

강남구 개포동 화실에서 만난 이현세 화백은 부드럽고 따뜻한, 그리고 여전히 잘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그의 남자다움을 돋보이게 만들었던 수염도 색이 바래 군데군데가 희었다.

“살이 좀 빠지신 것 같다”고 하니 “고맙다. 빠지긴 했는데 생각보단 잘 안 빠진다”며 웃었다.

근년 들어 이 화백은 외부활동이 많았다.

(사)한국만화가협회장을 맡았고, 최근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후진을 가르치고 있다. 홍보대사 직함만도 서너 개에 달한다.

“이제부터 개인의 영리만을 위해 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데 잘 안 되더군요. 하하! 이래저래 일이 많지만 난 괜찮아요. 가족들한테 미안해서 그렇지. 그래도 역시 이현세는 만화 그리는 일이 제일 재미있습니다.”

이 화백은 24일부터 스포츠동아에 신작 ‘창천수호위’를 연재한다.

미래무협수사극인 창천수호위를 두고 전문가들은 ‘이현세의 귀환’이라 평하고 있다. 이현세의 야성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는 의미다.

“맞죠. 돌아온 ‘마초’죠. 이현세다운 만화를 한 동안 못했어요. ‘천국의 신화’ 재판 건으로 6년 이상 허비했고, 그 뒤로는 학습만화나 골프 만화 같은 것들을 했으니까요.”

“이현세다운 만화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마초만화’라고들 하죠. 남성적이고, 거칠고. 나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곽경택, 박찬욱도 보면 여자 심리를 잘 모르는 게 분명해요. 남자적인 감성은 섬세하게 나오는데, 여자는 아무래도…. 상황이 주어졌을 때 여성의 마음이 잘 안 와 닿아요. 인지하고 생각해야 하죠. 그래서 어려워요.”

창천수호위는 이현세의 분신과도 같은 남자 주인공 ‘까치’ 오혜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하고 있다. 이 화백은 언제부터인가 까치를 자신의 작품에서 슬그머니 배제시켜 왔다.

“까치다운 까치가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작품은 아마도 ‘남벌(1994)’이었을 겁니다. 사실 저는 기본적으로 까치로부터 도망을 치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뭔가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데 ‘이현세 만화=까치·엄지’라는 인식이 어느 순간부터 방해요소가 되더군요.”

서민적인 삶을 그리고 싶어도 까치가 등장하는 순간 히어로물로 여겨진다는 얘기다. 학습만화도 마찬가지.

이현세



정보전달력이 떨어지고 엔터테인먼트 면이 부각되어 버린다.

그 동안 이 화백의 작품에서 까치가 빠지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 화백은 대하역사물 ‘천국의 신화’로 인해 장장 6년이나 길고 지루한 재판을 벌어야 했다.

“재판이 끝나고 보니까 이현세라는 작가는 있는데, 보는 독자는 없어져 버린 겁니다. 10대는 이미 일본만화에 몰입됐고, 이현세를 즐겨 보던 30-40대는 만화를 잘 접하지 않는 세대가 된 거죠. 그래서 나름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리모델링을 한 겁니다.”

‘내 독자층인 30-40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라는 물음으로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결국 이들이 대부분 자녀를 둔 학부모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현세를 읽고 자란 세대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학습만화를 그렸다. 다시 물었다. ‘30-40대는 무엇을 할까?’ 골프가 떠올랐다. 현재 골프를 하고 있든지, 형편이 좋아지면 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골프만화 ‘버디’가 탄생했다.

“이 두 개로 4-5년을 온 거죠. 한 마디로 이현세가 다시 자리매김하기 위해, 생활을 하기 위해 기획해서 만든 작품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반면 창천수호위는 ‘이현세가 살아있다’라는 증명이죠. 당연히 가장 이현세다운 만화가 될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니까요.”

창천수호위를 관통하고 있는 소재는 무협이다. 이 화백은 지금까지 무협을 다룬 작품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SF물도 ‘아마게돈’이 거의 유일하다. 본래 현실적인 리얼리티에 기반을 둔 작풍 탓일 것이다.

“무협을 하나 하긴 했어요. ‘이 땅에 내가 남은 것은 의기천추’라는 작품인데 임진왜란 때 옥쇄를 찾는 한 무사의 여정을 다룬 거지요. 하지만 무협이나 판타지 쪽은 거의 손을 안 댔습니다. 그러다 창천수호위를 하기 전에 일종의 각성을 한 거죠. 미래무협인데, 뭔가 아주 다른 방향으로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만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소스 멀티유즈’와 글로벌 콘텐츠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무협은 세계에서도 널리 인지된 가장 동양적인 판타지니까요. 창천수호위 작업을 할 때 개인적으로 참 재밌어요. 이걸 그리면서 ‘내가 살아있다’라고 느낍니다.”

“창천수호위는 기존 그림체와 많이 다르더군요. 파스텔조의 색감도 인상적입니다만.”

“이번에 시도한 겁니다. 원화의 가치를 높이고 싶었지요. 만화도 다른 회화처럼 전시물로서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작가들의 원화는 스케치가 남아있지 않아요. 연필 위에 펜을 입혀버리니까. 창천수호위는 연필 스케치로만 원화를 남기고, 채색 등은 컴퓨터로 작업합니다.”

창천수호위를 위해 새로운 연출도 실험 중이다. 한 페이지마다 원화로서 가치를 지니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쓴다. 그래서 창천수호위는 지금까지 이현세의 연출법과는 많이 다르다. 당연히 느낌도 다르다.

이 화백은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해 오면서 새로운 소재를 다룰 때마다 새로운 그림 스타일을 선보였다.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카론의 새벽’, ‘두목’, ‘천국의 신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 화백은 “새롭게 그릴 때마다 주변에서는 내가 안 그리고 다른 사람을 시켰을 것이라고 하더라. 그러나 모두 내가 그린 것”이라며 웃었다.

이현세



이 화백은 내년쯤 창천수호위의 원화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평면적인 전시가 아닌, 작품 설정대로 2030년의 미래세계를 전시장에 펼쳐놓을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현세의 만화는 마초적이다’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조차 남성적이라는 말이 있다. 이 화백도 수긍하는 부분이다. “남자 이야기, 특히 거세당하지 않았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죠. 여성이 문화를 주도하는 시대에는 쉽지 않은 얘기겠지만. 창천수호위는 바로 이 거세당하지 않은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까치’ 오혜성은 천하무적이죠. 절대적인 무공을 지닌, 아주 쿨한 남자입니다. 창천수호위의 주인공은 오혜성이지만, 오혜성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가족, 자연, 사랑… 매번 주제가 새롭게 정해지지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매력적인 방식이라고 봅니다. 이야기의 본질을 알고 만화를 보면 더욱 재밌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창천수호위는 서구의 그래픽노블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래픽노블은 유럽, 미국에서 크게 인정받는 장르다. 철학적일 정도로 깊이 있는 대사와 지문, 하나의 회화작품과 같은 완성도 높은 컷을 특징으로 한다. 영화로도 크게 히트 친 프랭크 밀러의 ‘300’이 대표적인 예다.

“스토리를 쓰고 있는 최성현 작가와 이야기 한 것도 이 부분입니다. 왜 그래픽노블이 한국의 독자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가. 결국 읽는 방법이 다른 거지요. 아시아의 스토리만화는 영화를 보듯 접근이 쉽고 빠릅니다. 반면 그래픽노블은 시를 닮았지요. 아시아적이고, 영화적이며, 극적인 스타일과 그래픽노블의 완성도를 하나로 합쳐 새로운 만화를 만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창천수호위입니다. 창천수호위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한국만화에 또 하나의 틈새시장이 만들어질 겁니다.”

이 화백은 ‘창천수호위는 읽는 게 아니라 느끼는 만화’라고 했다.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감동을 받는 만화가 아니라는 의미다. 끝으로 창천수호위를 기다리고 있는 스포츠동아 독자들에게 부탁의 말을 했다.

“만화를 좀 더 천천히 읽으시면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작가의 그림 한 컷 한 컷을 음미해 주신다면 10배쯤 재미있게 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창천수호위는 진짜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50대에 들어선 이현세가 가장 이현세다운 만화를 그린다고 할까요. 솔직히 독자 여러분보다 이현세가 더 재미있어하고, 더 기대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창천수호위에서 뵙겠습니다.”

[이현세 프로필]

1954년 경북 흥해 출생
만화가, 세종대 예체능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05), 대한민국만화애니메이션캐릭터대상 대통령상(2007)

대표작
저 강은 알고 있다(1979) 데뷔
공포의 외인구단(1983)
지옥의 링(1985)
야수의 전설(1985)
떠돌이 까치(1987)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1988)
아마게돈(1988)
블루엔젤(1989)
폴리스(1992)
남벌(1994)
천국의 신화(1997)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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