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아삭아삭! 황토 기운 품은 산삼 같은 무…

입력 2011-06-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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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팠던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고창 줄포면 상암리 무우밭의 밭두둑에 주저앉아 주머니칼로 깎아먹는 무우 맛은 그 어떤 과일보다 맛있었다. 황토흙에서 기세좋게 자란 무우는 전날 제법 비가 많이 내린때문인지 즙이 풍부해 갈증 해소에도 그만이었다.

9.군산~변산<하>
■ 상암리 무밭 습격사건

오전 7시 식사도 거르고 출발
아침 식전 배는 고파오는데
농번기 시골…문 연 식당 없어

상암리 무밭 보니 침이 꼴깍


인심 좋은 아주머니
뿌리 쑥쑥 뽑아 건네는데

밭두둑에 걸터 앉은 식객들
아삭아삭 씹는 소리만


비가 그친 뒤 맞은 아침은 깔끔하고 상쾌했다. 전날 내변산 산악도로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 젖었던 신발이 아직까지 축축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일단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자전거에 오르자 새로운 주행 의욕이 솟구친다.

어제 궂은 날씨 탓에 지리멸렬, 주행 거리가 짧았던지라 아침 식사는 길 위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전 7시에 줄포를 출발했다.

시골의 아침은 부지런한 농부들이 열어젖힌다. 곰소만을 오른쪽에 두고 달리는 내내 보리를 베는 사람들, 모내기를 준비하는 사람들, 무밭에서 김을 매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줄포면사무소 앞을 지나는 길에 농약통을 짊어진 채 자전거를 타고 밭으로 가는 60대 농부와 나란히 달리게 됐다.

농부의 자전거는 척 봐도 수십 년은 된 듯 낡았고, 바퀴며 프레임 여기저기에 묻은 황토 흙에서 오랫동안 논밭을 누비고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동류의식으로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 자전거 몇 년이나 타셨어요?”

“그때가 언제냐…. 막내가 중학교 다닐 때니까…. 한 30년 탔어요.”

“와∼ 그렇게 오래 타셨으면 그동안 고장도 많이 났을 텐데 쌩쌩 잘 달리네요?”

“쇳덩이로 만든 자장구가 뭐 고장 날 일 자주 있간디요? 생각나면 기름 쳐주고 가끔 다이야(타이어) 갈고, 쥬브(튜브) 갈아주면 되는 거지. 뭐 어쩌다가 브레끼(브레이크) 잡아주는 쇠가 절단나기도 했는디 용접하면 또 멀쩡해지구 그렇지요.”

농부 아저씨와 헤어져 부안자연생태공원으로 접어들면서 자전거에 관해 생각했다.

우리의 자전거는 요즘 MTB들이 다 그러하듯 티타늄, 카본 프레임에 유압 브레이크, 충격흡수장치를 갖춘 값비싼 모델들이다.

가격으로 치자면 농부 아저씨의 것보다 10배 이상 고가.

하지만 농부와 우리들, 과연 어느 쪽이 더 자전거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또 어느 쪽이 더 자전거 본연의 모습에 가까울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살짝 부끄러워졌다.


● 갓 뽑은 상암리 무의 달콤함이 준 아침의 행복

곰소만은 방조제가 없이 해안선이 그대로 살아있어 해안선 코스는 마을과 둑길과 논밭을 넘나든다. 아침 식전이어서 배가 고픈데 농번기를 맞은 시골마을에는 마땅히 밥 먹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장어로 유명한 고창인지라 가끔 장어집 간판이 눈에 띄지만 일요일 오전에 문을 연 곳은 없었다. 허기는 시시각각 확실하고 엄중하게 우리들을 옭죄어왔다.

선운산으로 이어지는 736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암리에 이르렀을 때 바다 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무밭을 만났다. 황토의 땅기운이 좋아서인지 청이 뻣뻣하게 웃자라 있었고 지면 위로 노출된 무 뿌리가 제법 팔뚝만큼 굵어 모두들 군침을 꿀꺽 삼킨다. 마침 밭 한가운데 젊은 부부가 거름을 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다짜고짜 무를 좀 달라고 구걸(!)할 수는 없어 공연히 객쩍은 몇 마디를 건네는데 아주머니는 눈치가 빨랐다.

큰 놈으로 서너 뿌리를 쑥쑥 뽑아 장갑 낀 손으로 흙을 척척 닦은 뒤 “아직 밑이 덜 들었을 텐데, 맛이나 보시라”며 건네주신다.

2. 우리의 자전거는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것이지만 시골 농부의 자전거는 생업의 수단. 30년이나 되어 낡고 녹슨 농부의 자전거가 품은 애환과 세월 앞에서 온갖 첨단 소재로 만들었다는 고가의 MTB는 빛을 잃었다.

3.고창 선운산 가는 길과 영광 법성포가 갈리는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는 자전거식객들.

4. 호남의 들녘은 한창 모내기철. 물을 가둔 무논에서 농부가 이앙기를 이용해 모를 심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손으로 모를 내는 장면은 추억이 되버린 듯하다.



…복분자술 한사발 들이켜니 힘이 불끈!


줄포면서 만난 60대 농부
30년 탄 철자전거에
감탄사가 절로 나와

고창 빠져나올 즈음 눈이 번쩍
앗! 복·분·자·술 시음장
음주 라이딩은 안되는데…

혀끝에 착착 감기는 술
자리 박차는데 극도의 인내심


비굴하다 싶을 만큼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밭두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를 깎았다. 아! 무가 이렇게 달고 맛있었다니. 모두들 말을 잃은 채 무에 탐닉해 아삭아삭 씹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그 어떤 과일도 지금 먹는 이 무에 비할 수는 없었다.

각자 거의 한 뿌리씩을 정신없이 먹고 나자 든든한 포만감과 함께 그제야 입술 주변이 살짝 맵고 지렸다. 그래도 파란 하늘에 둥실 흘러가는 구름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해풍 속에서 자연의 축복과도 같은 무를 깎아먹는 낭만은 여행길의 고달픔을 부드럽게 씻어내 준다.

선운산 북쪽 심원면을 지나 상하면으로 이어진 해안도로는 쓸쓸할 만큼 한적하고 길었다. 선운산이 뜬금없이 솟아있을 뿐 바닷가 쪽으로는 평야지대여서 시속 23km의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점심식사를 하기로 약속한 영광 법성포는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한다. 상암리에서 얻어먹은 산삼 같은 무우 덕분에 이제 더 이상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빈속에 무를 먹고 나니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 복분자술 시음장…‘음주 라이딩’ 유혹 겨우 이겨내

고창을 빠져나올 즈음 눈이 번쩍 뜨일만한 곳을 발견했다. 고창하면 장어와 함께 복분자술이 유명한데 길가에서 복분자술 시음장이라는 간판을 발견한 것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처럼 자전거 식객들이 복분자술 무료 시음장을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 복분자술 공장에서 운영하는 시음장에는 복분자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해놓은 각종 자료들과 복분자를 재료로 한 온갖 종류의 술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시음장 담당 여직원 백모씨(24)가 선글라스와 헬멧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용케 허화백을 알아본다. 열혈 팬이라며 어쩔 줄 모른다. 일반적인 복분자술부터 처음 맛보는 복분자 막걸리는 물론, 복분자로 곱게 빛깔을 낸 여러 종류의 쌀과자까지 대접이 융숭하다.

술맛이 무척 달아 생각 같아서는 아예 주저앉아 본격적으로 낮술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자전거로 달려야할 길이 있고, 음주 라이딩은 극도로 위험하다. 혀끝에 착착 감기는 술을 두 잔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데는 상당한 의지가 필요했다.

1시간 30분을 더 달려 구시포, 홍농을 거쳐 법성포로 들어가 굴비구이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함평을 겨냥해 백수해안도로를 탄다. 백수해안도로는 지금까지 달려온 평탄한 길과는 달리 굽이굽이 고개가 많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고갯마루를 오르면 내리막길을 시원스럽게 질주할 수 있다. 내리막길에서는 시속 45km가 찍힐 만큼 신나게 달리는데 오른쪽으로 펼쳐진 바다가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필자의 헬멧은 지난겨울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테이프로 구멍 일부를 막아뒀는데 테이프를 붙여둔 구멍에서 절묘하게도 속도에 따라 다른 음정의 풍절음이 난다. 대략 시속 20km쯤부터 저음의 퉁소소리가 나는데 30km에서는 오카리나의 음색이 발생하고 40km를 넘으면 사이렌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함평까지 가는 도중 내리막길에서 쾌속의 다운힐을 할 때면 헬멧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아이유의 ‘3단 고음’처럼 오르내렸다.

사진|김경민 포토그래퍼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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