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로 쓰는 HE-스토리] 김영만 회장 “후배들 복지기금 위해 다시 뛴다”

입력 2014-07-18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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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 한국경륜선수회 회장은 경륜의 매력에 대해 ‘깻잎 한 장 차이로 결정되는 짜릿한 승부의 묘미’라고 설명했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벨로드롬의 하얀 선이 선수들의 희비를 가르는 결승선이다. 광명|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 김영만 한국경륜선수회 회장

경륜 20주년…선수들 복지는 매우 열악
부상·은퇴선수 최소한의 생계 유지 필요
재능기부 통한 경륜 이미지 개선도 최선

이달 초, 대한민국 국토에는 아름다운 바퀴자국이 새겨졌다. 시각장애인 5명이 2인용 탠덤사이클을 타고 경기도 광명에서 출발해 부산 을숙도에 도착하는 4박5일 국토종주를 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일반인도 쉽지 않은 550km 대장정을 완주할 수 있었던 건 앞자리에 탄 경륜선수들이 그들의 눈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로 하나 되는 아름다운 동행’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주최하고 한국경륜선수회가 주관한 행사였다. 김영만(44)한국경륜선수회 회장은 스태프로 참가, 가이드와 장비 체크 등 안전 라이딩을 책임졌다. 여름 태양의 강렬함과 봄볕의 부드러움을 겸비한 김 회장의 ‘HE-스토리’를 들어봤다.


-탠덤사이클 국토 종주를 주관한 이유는.

“경륜선수의 재능기부 활동이다. 장애인에게 희망을 주고, 경륜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참가했다. 경륜선수와 시각장애인이 서로 배려하며 호흡을 맞춰 달리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한국경륜선수회는 어떤 곳인가.


“1998년 10월에 결성된 사단법인이다. 590명 경륜선수들이 회원인데, 선수들이 경주에 편성될 때마다 내는 3만원의 회비로 운영된다. 회장 1명, 부회장 2명, 11명의 이사(현재 3명 공석), 전국 30여개 훈련팀 지부장들이 모여 현안을 논의한다. 또 선수들을 대표해 경륜본부와 상금 등을 놓고 협상을 한다.”


-현재 선수회의 가장 큰 현안은 무엇인가.

“한국경륜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지만 아직 선수들의 복지는 열악하다. 선발급 하위 선수들은 상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낙차 등 부상으로 경주를 못하면 수입이 끊긴다. 더 큰 문제는 매년 유니폼을 벗는 18∼20명의 은퇴선수 대책이다. 그들은 경륜본부의 배려로 1년간 선두유도원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 후에는 생계가 막막하다.”


-선수회가 생각하는 대책은.

“경륜선수를 위한 복지기금이 필요하다. 경륜 수익금 중 상당액이 한국 스포츠 발전을 위해 쓰이지만, 정작 피땀 흘린 경륜선수들을 위한 혜택은 없다. 복지기금 신설을 놓고 본부와 논의를 하고 있지만, 입법·행정 절차가 필요해 쉽지 않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경륜선수회 회장에 당선됐다고 알려졌다.

“2011년 5대 회장 선거에 5명이 출마했으니 경쟁률이 5대1이었다. 당선되면 현역에서 은퇴해 협회 업무에 집중하고, 재정관리를 투명화하겠다는 공약에 회원들이 공감한 것 같았다. 내년 5월에 4년 임기가 끝난다.”


-한국경륜의 문제와 나아갈 방향
은.

“수익금을 공익을 위해 쓰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경륜을 레저가 아닌 도박으로 바라본다. 이미지 개선이 절실하다. 계속 하락하고 있는 매출도 선수회와 본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감위의 과도한 통제가 아쉽다. 이젠 온라인 베팅도 허용됐으면 한다. 회원제로 운영하고 베팅액을 제한한다면 과몰입을 막을 수 있다.”


-어떻게 경륜선수가 됐나.


“해병대 제대 후 호프집을 운영하다 절친 정한종(44·1기·현 연천군청 사이클팀 감독)의 권유로 1994년 10월 훈련원 2기로 입문했다. 당시 자전거를 타고 10km길을 출퇴근하고 있었다. 장래성이 불투명해 중3때 육상을 그만둔 이후 운동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운동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얘기에 꽂혀 호프집을 접었다. 훈련원 입소할 때 첫 아들이 막 백일 즈음이었는데 벌어두었던 돈으로 장비를 사고 6개월을 버텼다.”


-현역에 대한 미련은 없나.


“1995년에 데뷔해 2011년 은퇴할 때까지 선발과 우수급만 오갔다. 미련은 없지만 특선급에서 못 뛰어 본 게 약간 아쉽다. 비선수 출신의 한계도 있었지만 몸이 좋을만하면 낙차 등 부상을 당했다. 1998년 대상경주에서 선발급 우승을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김재학 기자 ajapt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ajap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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