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러브 스테이지] 진지함과 무거움 사이 톡쏘는 ‘장진표 위트’

입력 2016-03-10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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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얼음에서 형사1을 맡은 박호산과 형사2 김무열(왼쪽부터)이 빈 의자를 상대로 취조를 하고 있다. 박호산은 “실제로 살인 용의자가 앞에 앉아 있다고 여기고 독백하듯 하는 연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사진제공|수현재컴퍼니

■ 장진이 쓰고 연출한 연극 ‘얼음’

‘보이는 배우’ 두명의 형사 박호산·김무열
‘보이지 않는 배우’ 혁이와 치밀한 심리전
‘혁이가 진짜 살인?’…묘한 결말조차 매력

2인극일까, 3인극일까.

20일까지 서울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공연하는, 장진이 쓰고 연출한 연극 얼음은 두 명의 ‘보이는’ 배우와 한 명의 ‘보이지 않는’ 배우가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한 명의 배우는 보이지 않지만, 두 명의 배우에게는 보인다. 심지어 관객의 눈에도 선연히 보일 때가 있다. 소름이 돋는다.

무대는 경찰서의 취조실. 형사1(박호산 분)과 형사2(김무열 분)가 시신을 여섯 토막으로 나눠 유기한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고등학생 혁이(보이지 않는 배우다)를 취조하고 있다. 형사들은 혁이를 취조하며 살해한 여인과 혁이의 관계를 알아가게 된다. 형사와 보이지 않는 혁이와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이 기가 막히다. “이게 뭐지?” 싶던 관객들도 슬금슬금 무대 쪽을 향해 몸을 당겨 안게 된다.

장진의 연극은 둘 중 하나다. 너무나도 웃기든지, 너무나 진지하면서 가끔씩만 웃겨주든지. 이 연극은 후자다. 진지하고 무겁고 어렵다. 하지만 진지함과 무거움 사이에 장진 스타일의 유머와 위트라는 링크가 연결되어 있다. 치밀하고 냉정한 형사1보다는 걸걸한 사투리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형사2가 웃음을 좀 더 담당한다. 김무열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균형을 잘 잡았다. 박호산은 노련한 배우답게 장진이 감추어 둔 장치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해석한 연기를 보여준다.

얼음은 어쩌면 관객들에게 상당히 불친절한 작품일 수도 있다. 제목부터가 수상하다. 왜 얼음인가. 극 중 얼음은 김무열이 냉커피를 타 먹는 장면에서 단 한 차례 등장한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제목으로 등장할 만큼 얼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저, 냉커피에 들어간 얼음일 뿐이다.

이런 류의 작품을 쓰고 연출할 때의 장진은 관객뿐만 아니라 배우에게도 불친절한 작가이자 연출가다. 배우들이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물어도 그저 특유의 장난스런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런데 장진이 뜨끔할 정도로 핵심을 파고든 배우가 박호산이다.

마지막 장면을 잊기 어렵다. 과연 용의자 혁이는 토막 살인사건의 범인인가, 아닌가. 범인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아니면 범인인데 아닌 것으로 아는가. 취조실을 나와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던 형사1은 돌연 객석을 바라보며 고통과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해석불가의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암전. 끝.

이 짧은 순간의 표정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형사1은 진실을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하는가. 극이 끝난 뒤 형사1을 연기한 박호산에게 물었다. 그는 시원한 답변 없이 그저 아는 듯 모르는 듯한 미묘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연출이나 배우나, 다 ‘얼음’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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