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 오디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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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기 전.

셀 수 없이 많은 원형시계들이 오르지 않은 막 위로 별처럼 가득 뿌려져 있다.

초침들이 마치 세계의 종말을 선고하듯 불길하게 째깍거린다. 객석을 향한 수많은 눈알처럼 보여 섬뜩하기까지 하다. 사신의 시선 같다.

사신 류크가 심심해서 지상으로 떨어뜨린, 이름이 적힌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는 데스노트.

우연히 데스노트를 손에 넣은 천재 고등학생 야가미 라이토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해 어떤 사건이라도 해결해내고 마는 세계 최고의 명탐정 엘(L). 두 사람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뮤지컬 데스노트의 뼈대를 이룬다.

이번 시즌에서는 홍광호와 고은성이 ‘야가미 라이토’, 김준수와 김성철이 ‘엘’을 맡고 있다.

김준수의 ‘엘’은 초연 때에도 보았다. 2015년 초연과 2017년 재연 때에도 굳건히 ‘엘’의 자리를 지켰던 김준수다. 그가 이 캐릭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심지어 그의 ‘엘’은 진화 또는 변화했다. 운 좋게 무대 가까운 자리에서 마주한 그는 초연 때의 ‘엘’과는 사뭇 다른 해석을 보여 주었다.

김준수다운 몸쓰기는 그대로다. 그의 움직임에서는 다른 뮤지컬 배우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선’이 나온다. 걷다가 반대편으로 몸을 휙 돌리는 동작 하나만으로 캐릭터를 순식간에 드러내는 움직임은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시즌에서 김준수는 새로운 ‘얼굴’도 소개한다. ‘엘’의 명넘버 ‘게임의 시작’에서 김준수는 최대한 눈을 깜빡이지 않고 표정을 고정시킨 채 크게 입을 벌림으로써 상상, 분노, 기대, 의지가 뒤섞인 연기를 선보인다. 무대 뒤편을 향해 걷던 ‘엘’이 뒤를 돌아보며 “고등학생이야”라고 내뱉는 부분에서는 팔의 소름을 확인하게 된다.

김준수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어쩌면 뮤지컬에서 금기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무에 박힌 조각칼처럼 선명한 대사 전달력으로 금기를 박살내 버린 배우다. 무엇보다 김준수의 음색은 다른 캐릭터와의 이중창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상대의 소리가 어떤 결을 갖고 있든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개인적으로 이를 ‘깍지력’이라 표현하고 싶다.

이번 시즌 김준수의 ‘엘’에게서 초연 때의 ‘엘’과 사뭇 다른 느낌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엘’이 지닌 분노의 질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연의 ‘엘’에게서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 또 다른 천재 라이토라는 존재에 대한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엘’은 죽음의 대결조차 하나의 게임으로 받아들이는, 라이토와는 비켜간 의미에서의 사이코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서 김준수는 ‘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엘’이 풍기는 전체적인 감정의 핵은 ‘게임’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세상의 구세주로 추앙받는 ‘키라(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라이토의 존재·구세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를 그가 데스노트를 통해 죽인 악인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 왜곡된 정의를 바로잡고, 구세주라는 가면을 쓴 또 다른 살인마에 대한 분노를 김준수는 여과없이 폭발시켜 버린다.

이 새로운 ‘엘’에게 라이토와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생사를 건 게임이자 자신이 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구현이다.

이번 시즌에 ‘라이토’로 합류한 고은성은 홍광호 못지않은 매력을 발산한다. 그의 드라이버 같은 강렬한 보이스는 ‘비밀과 거짓말’에서 김준수 ‘엘’의 소리판에 깊숙이 십자 나사를 박아 버린다. 그 합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그야말로 핵폭탄급.

마스크가 없었다면, 관객들의 함성으로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의 천정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