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야근하고 집에 오니 배가 출출했다. 어제 배달앱에서 주문해 먹다가 남긴 제육볶음이 떠올랐다. 냉장고 문을 열고 플라스틱 용기를 꺼내 별생각 없이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똑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너무도 평범한 장면 속에 있다. 환경호르몬, 정확히는 내분비계 교란물질(이하 EDC)은 우리 몸의 호르몬 체계를 몰래 흉내 내는 화학물질이다. 이름은 어렵지만 원리는 단순하다. 몸속으로 들어온 EDC는 여성호르몬인 척 행동한다. 혈액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자궁, 난소, 고환 같은 생식기관의 호르몬 수용체에 달라붙는다. 몸은 그것을 진짜 호르몬으로 착각한다. 쉽게 말하면 몸속 통신망에 가짜 공문이 끼어드는 셈이다.

원래 인간의 몸은 뇌-난소-자궁, 뇌-고환이라는 정교한 연결망으로 움직인다. 난소가 “배란됐다”는 신호를 보내면 자궁은 착상을 준비하고, 남성의 고환은 뇌의 명령에 따라 건강한 정자를 만든다. 그런데 EDC가 끼어들면 이 신호 체계가 흐트러진다. 자궁은 난소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생식기관은 엉뚱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런 물질이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하다는 점이다. 배달 음식 용기, 플라스틱 랩, 음료 캔, 종이 영수증, 방향제, 장난감, 화장품까지. 현대인은 하루 종일 EDC를 만지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뜨겁고 기름진 음식은 문제를 더 키운다. 삼겹살, 마라탕, 제육볶음처럼 열과 기름이 많은 음식은 플라스틱 속 프탈레이트 같은 화학물질이 더 쉽게 녹아 나오게 만든다.

“한 번 먹는다고 큰일 나겠어?” 맞는 말이다. 환경호르몬은 독극물처럼 사람을 바로 쓰러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 무섭다. 조용하다. 천천히 몸속 지방과 조직에 스며든다. 그리고 몇 년 뒤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성에게는 정자 수 감소와 정자 운동성 저하가 나타날 수 있다. 최근에는 정자 DNA 자체가 손상될 가능성도 주목받는다. 환경호르몬이 정자 핵 속 히스톤 단백질과 메틸기 같은 후성유전 체계에 영향을 미쳐 유전자 발현 방식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DNA 자체를 망가뜨리지 않더라도, 어떤 유전자를 켜고 끌 것인지에 혼선을 주는 셈이다.

여성의 몸에서는 더 직접적인 문제가 나타난다. 난임, 자궁내막증, 다낭성난소증후군, 습관성 유산과의 연관성이 꾸준히 보고 된다. 특히 비스페놀A(BPA)에 장기간 노출되면 자궁의 프로게스테론 수용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수 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려면 자궁내막이 정교하게 준비돼야 하는데, 그 과정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연구 결과도 충격적이다. 프탈레이트를 투여한 생쥐의 자궁 변화를 관찰했더니 원래 가지런했던 V자 형태의 자궁 구조가 찌그러진 형태로 변했고 수태율도 현저히 감소했다. 연구에서는 비스페놀A가 자궁내막 세포에, 프탈레이트는 자궁 근육층에 더 심각한 영향을 주는 양상도 관찰됐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환경에 더 오래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 한두 잔씩 마시는 아이스커피. 플라스틱 컵과 뚜껑. 배달 음식. 편의점 도시락.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즉석식품. 계산 후 무심코 만지는 영수증. 너무 익숙해서 아무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리함은 극대화됐는데, 몸은 점점 더 지쳐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환경호르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미 현대문명 자체가 플라스틱과 화학물질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리를 둘 수는 있다. 배달 음식은 가능하면 그릇에 옮겨 데우고, 뜨거운 음식을 플라스틱째 오래 두지 않는 것. 오래된 플라스틱 용기는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영수증 대신 전자영수증을 사용하는 것.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작은 거리두기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오래 산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단순한 수명이 아니다. 몸의 기능을 얼마나 오래 건강하게 유지하느냐다. 특히 생식력은 단순히 아이를 낳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호르몬, 대사, 면역, 노화 상태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민감한 생체 신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정현 원장/현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연세대 의대 졸업, 강남차병원 교수, 미즈메디강남 원장 역임

조정현 원장/현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연세대 의대 졸업, 강남차병원 교수, 미즈메디강남 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