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만난사람]‘카지노명문’UNLV도쿄캠퍼스세운피터야마구치

입력 2009-07-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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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대표는 한국의 우수한 젊은 인력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취업에 도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UNLV 도쿄 캠퍼스 세운 야마구치 대표.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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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아시아권이 세계 카지노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겁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력입니다.” 피터 야마구치(55) (주)CNH대표가 정확한 한국어로 말했다. 인터뷰를 위해 별도의 통역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몸속 절반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야마구치 대표를 만난 것은 그가 미국 라스베가스 네바다주립대학(UNLV)의 도쿄캠퍼스 운영을 맡게 됐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UNLV는 호텔 매니지먼트, 카지노 경영 관련 학과로는 세계 1위의 명성을 지닌 명문대학이다. 도쿄캠퍼스는 아시아 지역 카지노 전문 인력을 육성해 전 세계로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신설됐다.

개교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났고 2010년 3월부터 신입생을 모집한다.

야마구치 대표가 UNLV 도쿄캠퍼스의 운영자가 된 것은 그 역시 카지노 관리학을 전공한 정통 카지노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카지노 컨설턴트지만 한때는 날리던 라스베가스의 프로 갬블러였다. 한국 카지노 산업과도 인연이 깊어 강원랜드 카지노 건설계획에 참여했고, 워커힐 카지노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야마구치 대표의 인생은 마치 한 판의 도박을 연상하게 만든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7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초중고를 다니고, 대학에서 호텔 경영학을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일본계 미국인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의 인생 그래프가 난폭하게 상하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징병되어 베트남전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스파이 혐의로 월맹군에 잡혀 죽을 정도로 고문을 받았다. 본인은 당시를 “요단강을 거의 건너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죽음 앞에서 그는 겸허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다시 살 수 있게 된다면 남들과 다른,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이라고 여겼다.

미군 신분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이태원에서 복무하면서도 내내 음악을 생각했다. 중위 제대 후 미국으로 돌아가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기타와 보컬을 맡았다. 팝스타 신디 로퍼도 무명시절 그와 같은 밴드에 몸을 담고 있었다.

밴드생활로 모은 돈을 들고 세계 최고의 음악명문 줄리어드의 문을 두드렸다. 줄리어드에서 작곡을 공부하며 음악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계가 그가 직접 목도한 음악의 세계였다.

돈을 벌어야 음악을 할 수 있었다. 돈을 벌기로 했다. 야마구치 대표의 비즈니스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뉴욕에서 리무진 회사를 차렸습니다. 자동차를 180대 정도 갖고 있었으니 작은 규모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노조니 뭐니 늘 골치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사업이 없을까’를 고민하게 됐지요.”

그가 MIT의 블랙잭 클럽을 알게 된 것은 1980년의 일이다. 프로 갬블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뉴욕에서 보스톤으로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대부분 통계학에 관련된 공부였다.

“원래 갬블을 좋아하는 성격이 못됩니다. 그냥 호기심 반 재미 반, 알아나 두자 싶었지요. 보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조파업으로 갈 데까지 간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1년 여간 온갖 애를 썼지만 결국 일본기업에 회사를 매각하고 말았다. 제2의 인생을 위해 라스베가스로 이주해 프로 갬블러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UNLV에서 2년 동안 카지노 매니지먼트를 공부했다.

“솔직히 카지노 경영에 대해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갬블러 생활을 하면서 적을 이기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UNLV에서 공부하면서 몰랐던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겁니다. 카지노 산업이란 매혹적인 세계를 말이지요.”

프로 갬블러 일을 접은 그는 카지노 컨설턴트로 변신했다. 이름이 알려지다 보니 한국에서도 그를 찾았다. 강원랜드는 초기 단계부터 컨설팅 참여를 했고,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무의도에 리틀 라스베가스를 만들자는 안이 추진돼 세계 호텔 카지노 경영자들을 이끌고 내한하기도 했다.

“한국의 카지노는 잘못됐습니다. 카지노에 카지노뿐이니까요. 카지노 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컨벤션센터, 호텔, 레저, 문화, 쇼핑 등 다른 산업들이 같이 물려줘야 합니다. 라스베가스만 해도 타이슨의 세계타이틀매치니, K-1이니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경기들을 유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호텔에서는 유명한 뮤지컬과 쇼를 매일 공연합니다. 라스베가스는 카지노뿐만 아니라 쇼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도 브로드웨이를 앞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하나로 합쳐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카지노 산업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야마구치 대표는 한국의 카지노 시장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환경과 조건만 놓고 봐도 마카오는 한국보다 한참 뒤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정부와 국민들의 카지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안타깝다. 드라마, 영화 등에서 카지노를 마치 무슨 범죄조직처럼 묘사하고 있는 점도 우려스럽다.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제재를 가할수록 음성으로 가게 됩니다. 차라리 밖으로 내놓고 양성화 시켜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도박판으로 만들 수 없다고요? 그럼 미국은 지금 전국이 도박판이 되어 있나요? 일본 파친코 산업 연간 매출액이 30조 엔입니다. 한국 돈으로 400조쯤 되지요. 일본 사람들이 노름으로 다 망했습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출입국 통제가 강화되면서 마카오가 다시 뜨고 있다. 지난 1월 카지노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 대만은 2012년부터 카지노 문을 연다. 중국은 상하이와 내몽고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계획 중이다.

불교나라인 태국조차 쓰나미로 타격을 입은 관광산업을 복구하기 위해 올해 안으로 카지노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2010년 두 군데에 카지노를 오픈한다. 지난해 거품이 빠지면서 주춤했던 두바이도 카지노 사업을 검토 중이다.

도쿄 UNLV은 카지노 전문인력, 즉 간부사원을 양성하는 곳이다.

“카지노 시장이 원하는 인력은 일용직이 아닙니다. 딜러요? 딜러는 단순 노동직이지요. 아무리 한국인이 딜러를 잘한다고 해도 외국 취업이 안 됩니다. 전문직이어야 취업이 쉽고, 보수가 높고, 차별도 없지요.”

그런 점에서 학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야마구치 대표는 “내 인생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돈보다는 뭔가 남을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가 “한 말씀만”하며 덧붙였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자신의 장래, 비전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문은 두드려야 열린다고 나와 있지요. 확고한 의지와 노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꼭 카지노 간부사원이 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한국인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 우수성을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 나가서도

인정받고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힘을 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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