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대한축구협회 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한 일선 지도자들은 막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허정무(사진) 감독에게 “내년에 대표팀에서 꼭 좋은 성적을 내 땅에 떨어진 국내 지도자들의 자존심을 되찾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허 감독이 잠시 후 “최선을 다 하겠다”고 답하는 장면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히딩크 이후 4명의 외국인 지도자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령탑에 오른 후 자신의 양 어깨에 국내 지도자들의 명운이 달려있다는 중압감은 상당했을 터.
1년여가 지난 후 허 감독은 이런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털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허 감독은 11일 기자회견을 갖고 “다시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가장 걱정된 것 중 하나가 우리 국내 감독들에 대한 평가였다. 나로 인해 다른 훌륭한 지도자들이 잘못될까봐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이어 “히딩크 감독이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02년의 여운에만 잠겨 있어서는 안 된다. 업적은 업적대로 남겨두고 새 우물에 꿈과 희망을 담아야 할 때다”고 강경한 어조로 호소했다. 요르단, 북한과 연이은 졸전 끝에 경질론까지 시달리다가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사우디전 승리를 계기로 극적인 반전에 성공한 허 감독. 그가 내년 말에는 어떤 심정으로 마이크 앞에 서게 될까.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