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환의춘하추동]야구와함께한일본의근대사

입력 2009-04-29 22: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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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야구를 국기로 생각하고 있다. 야구의 역사가 곧 미국의 역사라 할 정도로 미국의 역사 속에 야구의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구시즌에는 농구에 열광하고, 미식축구시즌엔 슈퍼볼에 미국 전체가 들썩거린다. 유소년부터 1인1기를 장려하며 스포츠를 통해 인성교육과 건강체력을 장려한 교육정책이 오래전부터 유지되고 있고 그 영향이 크다고 보여진다. 한편 일본에서는 단체경기 중 야구만큼 열광하는 종목을 찾아보기 힘들다. 같은 야구인으로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그들의 야구사랑은 본바닥 미국보다 훨씬 앞선다. 출근길 전철 안에서도 그렇고 직장 내에서도 틈만 나면 야구얘기로 시작해서 저녁 잠잘 때까지 야구로 도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가 일본 세이부 라이언스에 유학 중일 때 그들의 야구역사를 더듬어 본 적이 있다. 우리보다 십수 년 앞선 19세기 말에 야구가 일본에 소개되자 그들은 국민교육에 야구를 원용한 흔적이 보였다. 야구경기에서는 자기포지션이 정해져 있고 타순도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질서의식과 복잡한 규칙을 지키는 법정신, 그리고 협동과 인내라는 단체정신을 학원스포츠를 통해 길러나갔던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국민성과 일본사회에 어울리는 스포츠였고 국민계도에 필요한 체육종목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1930년 전후의 제국주의 일본은 야구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희생정신을 강조했고, 야구의 보급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1935년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베이브 루스 포함)을 초청하고 그해 첫 프로야구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창단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당시 요미우리 구단주인 쇼리키는 팀훈에 ‘미국을 추월하라’고 할 정도로 전운이 점증할 때다. 비록 2차대전 중 야구경기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야구선수 중 가미카제 전투기 조종사로 전사한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패전 후 초토화된 폐허 속에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일본국민의 사기진작을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일본 외무장관에게 물었을 때 그는 “야구를 부활시켜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외무장관도 학생시절 야구선수 출신이었다고 한다. 우리야구도 100년 전 YMCA 야구단을 시발로 일제시대부터 관립학교에 모두 야구가 있었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사립민족학교에도 야구부가 만들어져 지금의 한국야구 뿌리를 이루었던 것이다. 다만 지금과 다르다면 그 시절 야구선수들은 미국유학생 또는 일본유학생 출신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공부도 잘했던 모양이다. 광복 후 사회각계각층에 야구선수 출신의 지도자가 많았던 걸 보면…. 야구인 프로야구의 기본철학은 마라톤과 같다. 하루에도 죽었다 살았다를 수없이 외치며 산넘고 물건너 구비구비 돌아가는 인생의 축소판에서 팬들과 함께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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