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홀리는 스탠드의 마술사였지”

입력 2009-10-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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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해태 타이거스의 응원단장 임갑교 씨. 비록 팀의 이름은 해태에서 기아로 바뀌었지만 타이거스의 10번째 우승을 기원한다고 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회사 야유회서 시작된 응원이 야구장까지 진출
337 기차박수 내가 개발했어…따라하기 쉽잖아
아내 내조있어 가능…올해 우승? 딱 보니 KIA야!
“10년 넘게 모든 경기를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누가 이길지 감이 오더라고요. 그동안 90%% 정도는 맞췄죠. 올해 우승이요? KIA입니다.”

임갑교 전 해태 응원단장. KIA의 전신인 해태가 V9을 이루던 시절 임 단장은 항상 팀과 함께 했다. 1980∼1990년대 야구장을 즐겨 찾은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정도로 유명 인사다.

응원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 프로야구 최초의 응원단장을 맡아 해태 선수와 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겨준 임갑교 씨. 야구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생활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야구는 자연스레 그의 삶이 됐다.

“공군에서 응원을 배웠어요. 중고 시절 밴드부에 있을 때도 앞에서 지휘 했고요. 회사 야유회에서도 응원을 이끌고 상도 받고 그랬죠. 그게 눈에 띄었는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부산에서 치른 롯데와의 개막전 원정 경기에 응원하러 가라고 하더라고요.”

이 날의 경기는 해태제과 본사 냉동 수리실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 임 씨의 운명을 바꿨다. 버스 5대를 동원해 함께 내려간 200명의 해태제과 직원 앞에서 응원을 이끌었지만 민망한 마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기는 롯데에 대패했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제대로 된 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롯데한테 망신당하고 오니까 관중을 끌어당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응원 연습은 엄청나게 하고 갔는데 뜻대로 안됐거든요. 그래서 연구했죠. 따라 하기 쉬운 걸 하자. 그래서 337박수, 기차 박수 등을 했어요. 또 엉덩이를 돌리는 섹시 춤이 빨리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고 생각해 했죠.”

반응은 금세 왔다. 하긴 이 시대에 이런 응원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의 응원은 점차 인기를 끌었고, 1983년 한국시리즈에선 동료 50명을 따로 혹독하게 훈련해 해태의 첫 우승을 도왔다.

“스탠드의 마술사였죠. 교향곡을 지휘하는 사람이랄까. 제가 손을 움직이면 마음대로 박수를 이끌어낼 수 있었어요. 회사에선 이상국 당시 해태 홍보과장이 아예 해태 타이거즈로 오라고 했고요. 야구장의 스타가 된 듯했죠. 당시엔 야구를 동대문야구장에서 했는데 식당에서 자장면을 먹으면 돈을 받지 않았고, 우승하는 날에는 서로 나이트클럽에 데려가려고 했었죠.”

응원단장으로 성공하는 데는 가족의 내조도 컸다.

사실 야구단에서 일하는 남편을 둔 가족으로서는 시즌 중 휴일과 휴가 없이 돌아다니는 남편과 아빠가 탐탁할 리 없다. “아내의 도움이 컸어요. 정신적으로 많이요. 응원복도 직접 만들어 줬죠. 동대문에 가서 반짝이를 사다 붙여 주고, 작은 키를 감출수 있는 나팔바지도 해줬죠.”

임 씨는 7번의 우승을 함께한 뒤 1995년 원래 자신의 근무처인 해태제과로 되돌아갔다. 아예 타이거즈로 옮기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퇴직금 손해가 너무 컸다. 모험을 하기에는 나이가 이미 50세를 넘었다.

“정년퇴직하고 바로 대한극장 기계실에서 근무했어요. 그러던 중 2003년 기아에서 응원복을 맞춰 주고 잠실구장에 초청해 나갔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저를 기억하시더라고요. 다시 응원을 하는데 정말 생생했어요. 늙은 호랑이가 되지 않았구나 싶었죠.”

현재 그는 영등포의 한 호텔의 기계실에서 일하고 있다. 올해 65세인 그는 자신이 초창기 입은 응원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KIA가 올해 우승해 ‘V10’을 달성하면 야구 박물관에 기증해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끝난 문장이 아니다. 그에게 이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길상 기자 juna109@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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