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부친에‘사랑의총알’사격황제진종오“아버지께세계新선물”

입력 2009-04-22 00: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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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오의 격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힌다. 진종오는 병마와 싸우는 아버지를 바로 옆에서 간호하면서도 얼마 전 2009창원월드컵사격대회에서 20년 만에 세계기록을 경신했다.스포츠동아DB

남들 10시간 공부할 때 6시간만 책을 보고도, 전국 1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이 있다. 이만 하면 천재인 것은 분명하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니체, 평생을 콤플렉스 속에 살았던 쇼펜하우어, 건망증이 심했던 슈베르트, 그리고 충동적 언행으로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던 베토벤. 천재라면 이렇게 좀 모자란 구석도 있어야 범인들에게 위안을 주건만, 이 사람은 인격적으로도 어딜 가나 칭찬일색. 올림픽에서 따낸 1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도 모자라 최근에는 세계기록까지 경신한 사격의 황제를 만났다. 둥글둥글한 얼굴과 입가에 끊이지 않는 미소. 인상이 준 정겨움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도 배어나왔다. ○표적 정중앙을 겨누는 순간, 멈춰버린 총 지난 12일, 2009창원월드컵사격대회가 열린 창원종합사격장. 남자10m공기권총 본선 60발 가운데 단 한 발만을 남겨둔 상황. 관중석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59발까지 진종오(30·KT)의 점수는 584점. 10점을 쏘면, 1989뮌헨월드컵에서 세르게이 피지아노프(구 소련)가 세운 세계기록(593점)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사격대표팀 김선일(대구백화점감독) 코치는 사격꿈나무들에게 “진종오의 모든 것을 배우되, 격발만은 배우지 말라”고 한다. 보통선수들이 12초 내외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달리 진종오는 20초 가량이 흘러야 총구가 번뜩인다. 일반적으로 총을 오래 들고 있으면, 총구가 쉽게 흔들리고, 호흡도 불안정해진다. 김 코치는 “(진)종오가 총 쏘는 것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했다. 언제나 그랬듯, 격발타이밍이 길었다. “마지막 발을 잘 못 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어요. 한 세 번 쯤 총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지요.” “딱.” 10점. 적막감은 박수갈채로 대체됐다. 20년 만에 세계기록이 경신되는 순간이었다. 야구선수들은 컨디션이 좋은 날, “공이 수박 만하게 보였다”거나 “공이 내 몸 앞에서 멈추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진종오도 “정확히 표적 정중앙을 겨누는 순간, 총이 그냥 정지해버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냥 방아쇠만 당기면 됐다. 하늘이 내린 날이었다. ○암 투병 아버지 병상에 바친 세계기록 3월 중순, 대표팀에 합류한 진종오의 훈련기간은 고작 한달. 베이징올림픽 이후 대표선수선발에 반영되는 대회에도 미처 참가하지 못했지만, 특별케이스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대한체육회에서도 사격대표팀 인원을 한 명 더 증원하는 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낙하산’이죠. 그래서 더 부담이 컸어요. 저 하나 욕먹는 것은 괜찮지만, 지도자 분들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각종행사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했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학시절 축구를 하다가 얻은 부상 때문에 진종오의 오른쪽 어깨에는 철심이 박혀 있다. 피로감이 빨리 몰려오기 때문에 진종오의 훈련량은 원래부터 남들보다 적었다.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한 데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진종오는 “지난 연말, 아버지께서 위암판정을 받으셨다”고 털어놓았다. 소문난 효자인 진종오는 1,2월을 아버지 곁에서 보냈다. “운동은 안 된다”며 남들보다 늦게(고1) 운동을 시작한 아들을 극구 만류하던 아버지. 하지만 막상 정식으로 총을 잡고 난 뒤부터는 묵묵히 아들을 응원해주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항상 잘해도 뭐라고 하시는 분이신데. 금메달을 따고 돌아오니 말없이 안아주시더라고요. 어찌나 뭉클하던지. 대표선수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아버지께서도 ‘내가 아프니까 이런 것은 좋구나’ 하시더라고요.” 지성이면 감천. 진종오의 효심 덕분에 수술도 성공적이었다. 진종오의 세계기록수립 소식은 아버지의 얼굴을 더 밝게 했다. ○다음 번 목표는 결선세계기록 하지만 본선세계기록을 세운 이후 결선합계에서는 표적지 오작동의 불운 속에 2위. 진종오는 “우선은 오작동을 발견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면서 “그래도 큰 대회에서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됐으니 다행”이라며 웃었다. 2006광저우월드컵. 2관왕을 차지한 진종오는 국제사격연맹(ISSF) TV와 인터뷰를 했다.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진종오의 대답은 “더 나은 기록을 쏘는 것.” 2년 뒤 베이징올림픽을 겨냥한 답변이 나올 줄 알았던 관계자들은 흠칫 놀랐다. “제 목표는 총을 잘 쏘는 것이지, 금메달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금메달을 땄지만 나태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이번에 ‘다행스럽게도’ 결선세계기록은 세우지 못했으니,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죠. 누구나 인정하는 총잡이가 되고 싶습니다.” ○사격은 기술이 아니라 생각 진종오가 이대명, 이호림(21·이상 한체대) 등 아끼는 후배들에게 하는 조언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격은 60발이 아니라 한 발, 한 발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 10발을 쏠 때마다 숨을 돌리고, 30발을 쏜 뒤 ‘이제 절반’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면 반드시 나태함이 생긴다. 다음에 쏠 한 발, 이전 한 발도 생 각할 필요가 없다. 현재에 충실한 총잡이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밝다. 진종오는 “한 발에 목숨을 걸되, 한 경기에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역으로 큰 경기에 강할 수 있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희로애락(喜怒哀樂)입니다. 총을 열심히 쏘다보면, 그 속에서 기쁨도 슬픔도 다 묻어 나와요. 그래서 자만할 필요도 없고, 또 낙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격은 기술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표선수들의 실력은 종이 한 장차. 문제는 누가 중압감에서 벗어나, 한 발의 행위에만 몰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꼭 금메달 욕심뿐만이 아니다. 마음을 편하게 갖고자 하면, “최신 곡, 부부싸움, 심지어 어제 본 영화생각까지 난다”는 선수도 있다. 진종오는 “난 천재가 아니라 1,2,3등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았을 뿐”이라고 했다. ‘천재란 한 덩어리의 대리석.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정신의 칼끝을 가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이것으로 신상을 만들든지 물그릇을 만들든지 하는 것은 정신이라는 칼끝의 흔적에 불과하다.(비스마르크)’ 진종오가 잡은 것은 정신의 칼끝 대신 정신의 총구. 그렇게 표적의 정중앙을 뚫었다. 창원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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