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둥이 설기현이 이번엔 독 품었다 왜?

입력 2010-09-1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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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설기현이 14일(한국시간)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AFC 챔피언스리그 8강전 앞둔 각오를 밝히고 있다. 사진제공 | 포항 스틸러스

결전 앞둔 설기현 만나보니…
설기현(31·포항 스틸러스)은 순둥이? 마음이 여리다?

십분 이해가 간다. 상대를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은 여간 보기 힘들다. 후배들이 유니폼 상의가 찢어질 정도로 옷을 잡아채며 몸싸움을 걸어와도 아무 말 없이 툭툭 털고 일어난다.

“짜증을 낼 만하지 않냐”고 묻자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먼저 손을 잡아 일으켜 주면 십중팔구 경기 후 ‘아까는 죄송했다’고 정중하게 사과해요. 제가 ‘괜찮다. 그라운드에 선후배가 어디 있냐. 오늘 플레이는 훌륭했다’고 칭찬해주면 또 기분 좋아 하구요”라며 웃음 짓는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도 몰랐던 강한 ‘독’이 내면에 숨겨져 있다. 거친 유럽 리그를 홀로 버텨온 힘도 여기에 근거한다. 설기현이 선수 은퇴 후 지도자를 꿈꾸는 것 역시 이런 그의 강한 뚝심과 무관치 않다.

“선수 때도 그렇고 지도자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을 즐기는 제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도 놀라요.”

그래서일까. 일전을 하루 앞두고도 설기현은 담담했다.

포항은 15일 오후 11시(한국시간) 이란 조바한과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8강 원정 1차전을 치른다. 1500m 고지대에 원정 팀의 무덤으로 불리는 곳이다. 여기서 이기면 다시 알 힐랄(사우디)-알 가파라(카타르) 승자와 4강에서 붙는다. 지옥의 중동 원정을 또 거쳐야 한다. 그러나 설기현은 “이렇게 강팀들을 이기고 올라서서 2연패를 달성하면 진정한 챔피언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부쩍 자신감을 보였다. 14일 포항 선수단이 묵고 있는 이스파한의 한 호텔 로비에서 설기현을 만났다.


○12월까지 축구해야죠

포항은 K리그 정규리그 6강 PO 진출이 힘들어졌다. FA컵과 컵 대회도 일찌감치 떨어졌다. 챔스리그에서 탈락하면 11월 초 올 시즌은 끝이 난다.

K리그 최종전은 11월 7일이다. 그러나 챔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면 12월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

“제가 전반기를 부상으로 못 뛰고 이제야 조금 팀에 보탬이 되고 있는데 이렇게 끝나 버리면 너무 허무하고 아쉽잖아요. 12월까지 축구해야죠.”

게다가 그는 챔스리그 무대에 못다 푼 한(恨)도 있다.

작년 사우디 알 힐랄 소속으로 16강에서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움 살랄에 승부차기 끝에 무릎을 꿇었다. 설기현도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켰지만 팀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번이 챔스리그 두 번째 도전이고 제가 포항 소속으로 챔스리그에서 뛰는 건 내일이 처음이잖아요. 이번 기회를 꼭 살리고 싶어요.”


○알 힐랄은 내 손바닥 위에

포항이 조바한을 눌러야 할 이유는 또 있다.

4강에 오르면 그의 친정팀이자 절친한 선배 이영표(33)의 소속 팀 알 힐랄과 만날 가능성이 높다. 이영표는 최근 설기현에게 “포항도 좋은 팀이지만 아직 알 힐랄에게는 부족하다”며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이영표와 맞대결보다 더 기대되는 건 바로 사우디 경험이다.

“제가 뛰던 작년과는 알 힐랄 선수 구성이 조금 바뀌었지만 주축 선수들은 90% 이상 같아요. 그들의 경기 스타일과 습성까지 하나하나 잘 알죠. 비디오 분석보다도 세밀하게 설명할 자신이 있어요.”


○나도 이제 포항맨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 설기현이 최근 후배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부쩍 늘렸다. 유럽에서 오래 뛰다 온 ‘하늘같은’ 선배에, 나이도 최고참급이어서 가뜩이나 후배들이 어려워하는 데 묵묵히 앉아만 있으면 분위기가 더 가라앉을 것 같아 일부러 먼저 다가섰다.

13일 코칭스태프 미팅이 끝난 뒤 전술 판까지 챙겨와 선수들끼리만 난상토론을 벌였는데 설기현도 적극 입을 열었다. 포항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후배들이 자칫 나태한 모습을 보일 때면 “이런 환경일수록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쓴 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훈련에서도 설기현의 성실함과 집중력은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유럽 선수들은 훈련할 때 집중력이 엄청 강하거든요. 슛 훈련만 봐도 우리는 무의미하게 강하게 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한 번을 때려도 정확하고 예리하게 하려고 해요. 저도 처음 유럽 가서 지도자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반드시 타깃을 정하고 차라’는 것이었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후배들도 충분히 수긍 하더라고요.”

이스파한(이란) |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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