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탄광에서 피어난 빌리의 꿈, 그 뒤엔 존귀한 희생이…

입력 2017-12-01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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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리노가 꿈인 어린 주인공을 통해 꿈이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사진은 소년이 온갖 역경을 딛고 발레리노로 성장해 가는 모습. 사진제공|팝엔터테인먼트

■ 영화 ‘빌리 엘리어트’

빌리의 꿈을 위해 파업 포기한 광부들
그저 아이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
무대 오른 빌리를 본 재키 눈엔 눈물이
아들의 꿈이 곧 자신의 꿈임을 깨달아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11살 소년 빌리 엘리어트의 아버지 재키는 팍팍한 삶의 와중에도 50펜스를 들여 아들에게 복싱을 가르치려 했다. 아버지의 강권에 떠밀려 마을회관의 복싱 체육관에 들어선 아들은 그 한 쪽 공간을 빌어 여자아이들이 발레를 배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아들은 어이없게도 그 길로 발레에 빠져 버렸다. “발레는 여자들에게는 정상적이지만” 남자에겐 아니고 “남자는 축구나 레슬링”을 해야 한다면서 아버지는 남성성에 관한 근거 없는 확신으로 아들의 의지를 때려가면서까지 막으려 했다. 하지만 어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

● 꿈은 탄광에서 피어났다


체육관에서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게 된 건 마을회관의 1층에 있던 발레교습소가 탄광노조의 파업으로 인해 광부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빌리의 형 토니와 그 아버지 재키가 소속된 영국 탄광노조가 1984년 ‘산업합리화’의 명분으로 광부들을 거리로 내몰려는 정부의 방침에 맞서 장기간 파업을 이어가던 때였다.

1979년 권력을 잡은 마거릿 대처 수상은 침체한 경제와 무기력해진 사회분위기를 되살린다며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이행해갔다. 대처의 정부는 경제 침체의 원인으로 이전 노동당 정부의 과도한 복지정책을 지목하며 그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재정지출을 줄였다.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시장경제 우선주의에 입각해 기업의 활동을 적극 보장하고 구조조정을 이어가는 등 강력한 정책을 펼쳐갔다.

영국 북부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탄광산업이 점차 힘을 잃어가던 시기, 광부들은 대신 노조의 힘을 얻고 있었지만 정부 앞에서는 끝내 무력했다. 대처는 이들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해 끈질기게 탄압했고, 결국 노조의 파업은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부흥을 이끌며 산업혁명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던 석탄이 어느새 애물단지 처지로 전락하고 마는 순간이기도 했다.

영국 북부에 재키와 토니 같은 광부들이 있었다면, 남부에서는 제철 노동자들이 이미 아픔을 겪은 터였다. 제철소가 문을 닫으면서 직장을 잃은 채 하릴없는 일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스트립쇼 무대에 나서기로 했다. 이들의 어이없는 ‘결단’이 얼핏 우스꽝스러울망정, 그 뒤에서 배어나오는 삶의 페이소스가 남긴 여운은 아직도 묵직하기만 하다. ‘풀 몬티’의 노동자 가즈와 그 일당들이 그려낸 풍경이다.

대처 이전 노동당 정부 아래서 정말 과도한 복지와 노조의 강력한 힘이 경제를 침체시켰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다만 대처리즘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서 서민들의 일자리와 먹거리가 줄어들었음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노동자 재키와 토니, 가즈가 처한 당대적 현실은 말해주고 있다. 또 더욱 힘을 키운 자본과 자산과, 이를 지니지 못한 대다수 사이에 벌어지는 ‘양극화’의 격차도 그만큼 커져갔음을 다양한 지표는 가리키고 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들. 사진제공|팝엔터테인먼트


● ‘개천의 용’, 그 꿈의 좌절! 그래도…

그런 지표 앞에서 아이들의 꿈은 서서히 사그라지고 마는 것일까.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간파해준 윌킨슨 부인의 권유로 로열발레학교 입학 오디션에 응하려 했던 날, 빌리는 파업에 앞장선 형 토니가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결국 오디션 응시를 포기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크리스마스의 밤, 체육관에서 친구에게 춤을 가르치다 끝내 포기하지 못한 꿈을 아버지에게 들켜버린 빌리. 아들의 간절한 표정 앞에서 아버지는 파업의 ‘배신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하나를 선택하면 그만큼 또 다른 한 가지를 내버리도록 강요당하는 현실. 가난한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위해, 그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을 버려야 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빌리의 꿈을 위해 재키 뿐 아니라 그 동료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을 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름 정당하다 믿었던 삶의 가치를 잠시 접고 파업 대열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토니와 동료의 분노 앞에서 재키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료들은 재키의 어려움에 대한 공감으로 빌리의 학비를 위해 한 푼 두 푼 모아보지만 위기에 내몰린 삶은 이미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 사회가 강요한 팍팍한 현실을 온전히 각 ‘개인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느냐는 질문이 과도한 해석이라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 질문은 빌리가 꿈을 이루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 빌리가 로열발레학교의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재키와 토니와 숱한 광부들은 파업을 포기당해야 하는 엄혹한 현실에 놓이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재키와 광부들은 자신의 처지보다 더 나아질 아이들의 미래를 기대한 것이 아니다. 그저 아이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다. 성장한 빌리가 한 마리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무대 위에 날아오를 때, 재키의 눈에 가득한 눈물도 아들의 꿈이 곧 자신의 꿈이었음을 새삼 깨닫는 때 고이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꿈은 존귀하리라. 그래서 더욱 묻지 않을 수 없다. 꿈은 개인일까, 세상일까. 개인의 것이라면 꿈을 지닌 해당의 개별적 존재들이 스스로 삶을 개척해 이뤄 가면 그뿐일 터이다. 하지만 빌리의 꿈은 개별적 존재로서 꾸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이뤄짐으로 가는 과정은 개별적이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가 닿을 수 없는 숱한 꿈들이 허망하게도 중도에 무너지고 마는 광경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도해 왔는가. 아직 채 피어나지 않은 어린 목숨들의 꿈을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현실을 또 얼마나 많이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는가.

그러니 꿈은 세상이어야만 한다. 세상은 애초부터 개별의 존귀한 꿈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세상은 개별적 존귀함의 꿈들과 꿈들이 일궈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도 그 개별적 존귀한 꿈들과 꿈들이 서로 부딪치고 어우러지는 마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꿈들은 개별적으로 더욱 존귀해지는 것이리라.

올해 9월 서울대 경제학부 박사과정 오성재 씨와 주병기 교수가 ‘재정학연구’에 실은 ‘한국의 소득기회불평등에 대한 연구’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자녀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밝혀 놓았다. 그리고는 ‘개천용 불평등지수’를 통해 그 기회란 것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인지도 설명했다. 그 지수가 1에 가까울수록 기회가 불평등함을 말해주는데, 이에 따르면 2014년 0.27이었다. 그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커져서 2001년 10명 가운데 한두 명이 최저 환경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면 2014년에는 4명에 가까워졌다.

언제까지 ‘개천의 용’의 꿈은 개인이어야 하는 것일까. 빌리는 ‘개천의 용’이었을까. 빌리의 꿈은 무자비한 현실 속에서 개별적 아픔들이 꾸역꾸역 감당해내야 했던 존귀한 희생 위에서야 가능했다고 말한다면 오독일까, 아닐까.

■ 영화 ‘빌리 엘리어트’

영국 북부 탄광촌의 소년 빌리 엘리어트가 발레리노의 꿈을 이뤄가는 이야기. 한 소년의 단순한 성장기가 아니라 1980년대 영국 탄광노조의 장기간 파업을 시대적·정서적 배경으로 펼쳐 놓음으로써 누구나 지닌 꿈이 결코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음을 드러낸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연출해 2001년 선보인 영화는 주인공 빌리 역의 제이미 벨에게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제이미 벨은 훗날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도 출연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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