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가장 재밌는 펠레 스코어? 이젠 강원 스코어도 있다”

입력 2019-06-24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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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FC.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말이나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당황스러울 때는 상황을 묘사하기에 너무 벅찬 장면을 마주했을 때다. 그 장면을 통해 빚어지는 희로애락이 화자(話者)나 글쓴이를 압도하게 되면 대개는 말문이 막힌다.

23일 열린 프로축구 K리그1(1부리그) 강원FC와 포항 스틸러스의 경기가 바로 그런 경우다. 0-4로 뒤진 강원이 후반부터 추격전을 펼쳐 추가시간에만 3골을 넣으면서 5-4의 대역전극을 펼친 건 만화축구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상상조차 못한 결과가 나오자 방송 해설자도 “이런 경기는 없었습니다” “처음 보는 경기입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각본을 써도 이런 각본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극장골이니, 역전극이니, 기적의 명승부니 하며 다양한 용어를 갖다 붙이지만 그 상황을 한방에 쓸어 담을 만한 적확한 표현을 찾기란 만만치 않았다.

이날 경기는 한국프로축구사를 새롭게 쓴 경기였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 따르면, 37년 K리그 역사상 0-4로 뒤지던 팀이 역전승한 건 강원이 처음이다. 또 양 팀에서 각각 해트트릭 선수가 나온 건 K리그 통산 3번째이자 2013년 출범한 K리그1에선 첫 번째 기록이다.

두고두고 봐도 좀처럼 믿기 힘든 대역전극을 간략하게 재구성해보자.

후반 11분까지는 포항의 일방적인 페이스였다. 외국인 선수 완델손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4-0으로 달아나며 누가 봐도 승부는 이미 기울었다. 특히 완델손이 해트트릭을 완성한 포항의 4번째 골은 골망을 출렁였는데도 싱거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반면 강원 선수들은 넋이 나간 듯했다.

영화에서는 반전이 시작될 때 힌트가 주어진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그런 정해진 시나리오는 없다. 볼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후반 26분, 반전의 서막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조재완의 만회골로 분위기는 달라졌다. 홈 팬들도 영패는 모면했다고 한숨을 돌린 타이밍이었다. 7분 뒤 발렌티노스가 추가골을 넣자 팬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지더라도 한 골 차까지는 따라가자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강원 김병수 감독도 벤치에서 일어나 선수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기대는 기대일 뿐, 축구는 역시 어려웠다. 강원은 90분 동안 추가골을 넣기 위해 애를 썼지만 더 이상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주어진 추가시간은 4분. 이 시간 동안 2골 차를 따라붙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강원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줄기차게 밀어붙인 끝에 91분 조재완의 헤딩슛이 골망을 갈랐고, 93분엔 또다시 조재완이 왼발 발리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조재완의 데뷔 첫 해트트릭이다. 조재완의 슬라이딩 세리머니에 동료들이 함께하며 기쁨을 나누는 동안 추가시간은 흘렀다. 승부는 무승부로 끝나는 듯했다. 이 정도에서 끝났어도 커다란 화제가 될 만한 경기였다.

하지만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나타난다고, 극적인 순간은 남아 있었다. 추가시간도 다 채우고 95분이 된 상황에서 정조국의 헤딩골이 터졌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느닷없이 전개된 것이다.

이 정도 명승부라면 외국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강원이 역사상 최고의 역전승을 만들었다” “강원의 팬들은 0-4에서 희망을 포기한 듯했지만,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등 외국 언론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이날 경기는 스포츠를 통해 팬들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감정을 끌어낸 한판 승부였다. 칭찬하고 싶은 것은 강원 선수들의 집중력이다. 4골 차로 뒤진 상황에서도 착실하게 추격을 했고, 결국엔 추가시간이 지난 뒤에도 승부를 가르겠다는 각오가 대역전극을 만들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승부근성의 강원 선수들은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다.

우리는 그동안 축구에서 가장 재미있는 경기를 ‘펠레 스코어’라 불렀다. 3-2의 한 골 차 승부는 전체적으로 18분에 한골씩 터지고, 이긴 팀은 30분에 한 골씩 기록하며 재미와 승부를 모두 가져가는 스코어다. 하지만 이젠 5-4의 ‘강원 스코어’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이보다 더 극적인 승부를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기를 본 홈 팬이라면 다음 경기에 경기장을 찾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만큼 평생 한 번 맛보기 힘든 감동을 한꺼번에 선물한 ‘강원 스코어’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

최현길 전문기자·체육학 박사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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