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기자의 AG 스토리] 셔틀콕 여제의 눈빛에 비친 어머니의 가슴

입력 2018-08-20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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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기 길영아 감독. 사진제공|삼성전기 배드민턴단

배드민턴 삼성전기 길영아(48) 감독을 19일 이른 아침 자카르타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입국수속 부스 앞 긴 줄에 섞여 있다 우연히 만났다. 한 시간 연착된 밤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 모두가 피곤에 지쳐있었지만 동안의 중년 여성은 현역 시절처럼 에너지가 넘쳤고 기품 속에 카리스마가 숨어 있었다.

‘길영아’, 30여 년 전 그 이름만으로 코트에 선 상대 선수를 떨게 했다. 빠른 스피드를 앞세운 폭발적인 공격력, 영리한 네트 플레이, 빈 틈 없는 수비까지…. 국내보다 동남아시아와 중국, 유럽에서 ‘셔틀콕 여제’로 더 유명했다.

인파 속 초롱초롱한 눈빛이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좋은 소식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다’며 아들 이야기로 인사를 건넸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길영아 감독은 현역시절 올림픽에서만 금·은·동메달을 모두 목에 건 슈퍼 스타였다. 세계선수권 등 국제대회에서 30여 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배드민턴이 처음 올림픽정식 종목이 된 1992바르셀로나 대회에선 여자복식 동메달, 1996애틀랜타올림픽에선 혼합복식과 여자복식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수상했다. 지도자로도 큰 성공을 이어가고 있다.

2011년 여성으로는 국내 최초 실업팀 총 감독이 됐다(이전에도 여성 감독은 있었지만 여자팀 전담이었다). 코트에서 존재감만으로 상대를 압도했지만 자카르타에서 만난 길영아 감독에게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것이 느껴졌다.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시켜 결전의 무대에 선, 긴장감도 느낄 틈이 없는 완벽한 승부사의 모습이 아닌 떨림과 기대, 작은 걱정이 엇갈린 듯한 눈빛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코트를 호령했던 ‘여제’가 아닌 아들의 큰 경기를 앞둔 어머니의 깊은 마음씨라고 짐작된다.

길영아 감독의 큰 아들 김원호(19)는 어머니의 팀 삼성전기에서 뛰고 있다. 고교생 때 이미 국가대표에 선발될 정도로 또래에는 적수가 없는 최고의 배드민턴 유망주다.

이번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AG)에서 김원호는 쟁쟁한 국가대표 선배들을 제치고 서승재(21·원광대)와 함께 남자복식과 단체전에 출전한다. 모두 중학생 시절부터 이용대의 뒤를 이을 한국 배드민턴의 미래라고 불렸던 주인공들이다.

길영아 감독에게 AG 금메달에 대한 추억을 물었다. 그러나 “사실 AG 개인전 금메달은 없다.

여자복식 은메달은 땄는데(1990베이징·1994히로시마) 금메달은 단체전에서 수상했다”고 말했다. ‘아들이 남자복식에서 큰일을 해내면 길 감독도 못 한 AG 개인전 금메달이 되겠다’고 말하자 이 세상에서 오직 어머니에게서만 볼 수 있는 웃음이 돌아왔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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