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기자의音談패설]베바도전‘7:1전쟁’

입력 2008-11-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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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주부·아파트관리소장까지꿈찾아…
문이 열렸다. 직원이 상반신을 안으로 내밀고는 “촬영 가능하십니다”라고 외친다. 잠시 침묵. 클라리넷을 쥔 중년남성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 “마음 편히 하시면 됩니다”는 심사위원의 말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온 몸에서는 ‘나는 긴장하고 있소’라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곡목을 소개하고는 이내 연주를 시작한다. 첫 소절은 그럭저럭 넘어가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고음에서 (소위 ‘삑사리’라고 하는) 소리가 갈라진다. 실수는 실수를 낳는다. 음색이 와들와들 떨리면서 당황한 속내가 내장을 내보이듯 드러나고 만다. 잠시 후 ‘땡∼’하는 종소리가 울린다. “수고하셨습니다.” 21일 세종문화회관 국악관현악단 연습실에서 있었던 세종나눔앙상블 단원 오디션 현장의 풍경이다. 이 앙상블은 직장인들에게 연주공간과 교육을 제공해 일반시민들의 음악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취지로 세종문화회관이 지원자들을 받았는데, 이른바 ‘베토벤 바이러스 효과’ 덕인지 30여 명 모집에 무려 270명이 지원해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예상을 초월하는 지원자들이 몰리자 세종문회관측은 본래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단원을 모집하려던 계획을 바꿔 오디션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130명의 지원자들이 20일과 21일 이틀에 걸쳐 바이올린, 비올라, 클라리넷, 플루트, 첼로 등 파트별 오디션에 참가했다. 전문 연주자가 아닌, 아마추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모집한 만큼 지원자들의 이력은 의사, 한의사, 주부, 자영업자, 공무원, 초등학교교사, 대학교수, 연구원, 약사, 방송국 직원, 증권맨, 항공사 직원 등 더 이상 다양할 수 없을 정도로 ‘컬러풀’했다. 심사위원들 역시 음악적인 기량 성숙도보다는 지원자의 직업과 음악에 대한 생각, 앙상블 참여 열의 등에 더욱 중심을 두는 듯 느껴졌다. 아파트관리소장으로 있는 강홍구(47) 씨는 학창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다. 하지만 요즘엔 바이올린에 푹 빠져 하루 1시간씩은 꼭 활을 잡으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합주를 희망하고 있다. 자신의 주특기가 ‘결혼식 축주’라고 밝힌 정순원(28) 씨는 현재 대기업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예술고교를 가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문계 고교에 진학해야 했다. 이번 오디션을 통과해 어린 시절 음악인의 꿈을 반드시 이루고 싶다. 모발이식 전문의 백중필(55) 씨는 음악을 전공하다 의사의 길로 전향한 세미 전문가. 캐나다 맥길 음대에서 클라리넷을 공부하다가 의대로 전과했다. 당연히 군계일학의 기량을 과시했고, 심사위원들로부터 “다른 사람들과 실력 편차가 심한데 괜찮겠느냐?”는 우려성 질문을 들었다. 클라리넷 부문에 응모한 한 남자 지원자는 한 눈에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기량이 떨어졌다. 심사위원이 “어디서 악기를 배웠는가?”라고 묻자 머뭇거리더니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어린 시절 한때 방황을 했고, ‘안 좋은 곳’에서 악기를 배웠다. 내 연주를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앙상블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남들 1시간 연습할 때 4시간씩 해 따라가겠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연주를 하고 싶다”고 말해 심사위원들을 감격하게 만들기도 했다. 심사위원과 참관자들은 클래식 앙상블 오디션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이 젊은이가 서툴게 연주하는 ‘렛 잇 비’를 들었다. 잠시나마 딱딱한 실내에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순간이었다. 메르카단테 플루트협주곡을 멋들어지게 연주한 강미진(31·약사)씨는 “혼자 연주하는 것이 쓸쓸해 함께 어울려서 하고 싶어 지원했다. 잘 하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약사면 바쁠 텐데 연습시간을 지킬 수 있겠는가?”라는 심사위원의 질문에는 “내가 오너니까 아무 때나 문 닫고 오면 된다”라고 답해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정단원 28명과 준단원 10명의 최종 합격명단은 25일에 발표되며, 12월 5일 세종나눔앙상블의 공식 창단식을 갖는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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