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드라마캐릭터열전]혼돈의 시대를 가르는 무사들의 검술

입력 2011-07-27 11: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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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벌판에서 두 사내가 마주친다. 언행이 무겁고 사려 깊은 사내는 부드러운 눈매 속에 가려진 날카로운 눈빛으로 갈 길을 방해하는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숨소리에서조차 살기가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의 또 다른 사내는 금방이라도 낙마할 것 같은 몸짓으로 상체를 흔들며 술을 마시며 말 위에서 상대방의 발길을 막아선다. 이윽고 정중동(靜中動)의 몸짓으로 바람을 가르며 대결을 펼치는 두 사내의 검술 대결이 펼쳐진다.

꽃과 나비조차 숨을 죽이는 명불허전의 검술 대결 끝에 음산한 기운의 사내가 자신의 승리를 확정짓고 술병을 건넨다.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는 술병을 받아 목을 축인 뒤 다음을 기약하며 급히 길을 재촉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무사, 적대적인 관계이면서도 상대방을 실력을 인정할 줄 아는 그들은 무림(武林)의 진정한 고수들이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으로 상징되는 병자호란의 참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조선의 정치 현실은 무림의 고수인 이들을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로 바꿔버린다.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많은 사람들이 역모의 누명을 쓴 채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상황에서 정 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대립각을 세우는 무사들은 바로 김광택(전광렬 분)과 천(최민수 분)이다.

역모의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아버지 때문에 13달 만에 비정상적인 몸으로 태어나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정조대왕의 호위 무관이 되어 동양 3국의 무예를 총망라한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무사 백동수(지창욱 분)의 일대기를 형상화한 ‘무사 백동수’에서 김광택과 천은 ‘무협(武俠)’의 정신과 본질을 설파하는 무사들이다.

무사 백동수의 한 장면. (사진출처=SBS '무사 백동수' 공식 홈페이지)

‘검선(劍仙)’이란 칭호만큼 조선 최고의 무예를 자랑하는 김광택은 정의와 도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무인이다. “검(劍)은 손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간절한 마음만이 검을 움직인다”는 지론을 강조하는 그가 정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단순명료하다.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100년 전에 효종이 남긴 ‘북벌지계(北伐之計)’를 찾아 나선 왕세자 이손(오만석 분)을 보필하고, 청나라와 대립각을 세우다가 정치적 위기에 처한 왕세자 이손을 구하기 위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정치적 희생을 당한 친구 백사굉(엄효섭 분)이 남긴 갓난아기 백동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팔 한 쪽을 희생하는 것이다.

영조가 조선의 무예를 높인 것을 치하하기 위해 ‘사인검(四寅劍)’과 ‘구생패(求生佩)’를 하사할 만큼 무협의 정도를 걸어가는 김광택이 자신의 팔 한 쪽을 희생하는 것은 무사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의 팔은 조선의 무예를 바로 세워 백성을 구하기 위한 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담긴 ‘구생패’를 참수형에 처해지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던졌듯이, 그는 왕세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검(劍)’을 잡아야 하는 팔을 던져 갓난아기를 구함으로써 친구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켰다.

눈앞의 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결국 어느 누구도 구할 수 없다며 자신의 팔을 희생한 그의 행동은 무협의 세계에서 정의와 도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한 쪽 팔을 잃어버린 김광택은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 무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소림사의 무예를 익힌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돌아온 외팔이’처럼 조선을 찾아온 그는 약초꾼 행세를 하면서 갓난아기 때 잃어버렸던 백동수를 다시 만나 무예를 전수한다.

무술과 무예 그리고 무도를 실천하는 ‘무(武)’에 정의와 도덕의 가치인 ‘협(俠)’의 가치를 결합한 ‘무협’의 정신을 강조하는 김광택은 무예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던 백동수가 조선 최고의 무사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정의의 상징이다.

병자호란 직후 청국의 대장군 ‘용골대’가 조선에 남겨둔 ‘살수(殺手)’ 집단 ‘흑사초롱’의 수장 격인 ‘천(天)’은 붉은 빛의 음산한 기운의 은신처에 기거하면서 정치권력의 실세들과 뒷거래를 하는 검객이다.

진정한 무사의 길을 걸어가는 김광택과 달리 자신의 검술을 이용하여 부를 챙기는 그의 행동은 사악한 악의 무리와 같다. 김광택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고수이면서,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그에게서 무사로서의 정의와 도덕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살성(殺性)을 갖고 태어나 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당할 뻔한 어린 여운(유승호 분)을 흑사초롱의 구성원으로 끌어들여 ‘살수’로 훈련시킬 정도로 냉정한 인물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살수로서의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망설이는 여운을 대신하여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모른 척하는 천의 모습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함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냉혈한 같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천이 처음부터 야비하고 냉정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김광택과 검술 대결을 하기 직전에 “오랜만에 광택이 칼 맛 좀 볼까”라고 농담을 던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산하고 서늘한 얼굴 표정과 달리 그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심성을 소유한 인물이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김광택 때문에 눈빛이 변한 것을 알게 된 뒤 심장이 멎어버린,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순정남이 바로 천이었다. 살수로서의 경계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항상 술병을 옆에 끼고 살면서 술에 취한 듯 건들거리는 그의 모습에서 실연의 상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신의 몸에 칼자국을 남긴 어린 백동수를 죽이지 않고 목숨만은 유지할 수 있게 살려준 것도 그의 따뜻한 심성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는 살수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유 없이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어둠이 지배하는 악의 무리로부터 살인을 청부 받아도 직접 나서지 않고 흑사초롱의 행동대장 격인 인(박철민 분)을 내세우는 것도 그래서이다.

비록 살인을 대행하며 살아가지만, 무사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리라. 그가 말 위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몸을 한 쪽으로 기울인 채 건들거리고, 냉소적인 눈빛으로 비아냥거리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개인적인 야망으로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자들의 탐욕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내면이 충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악한 악의 근원으로 무협의 본질을 훼손하는 그를 향해 마냥 비난의 화살을 날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인함으로 무장한 듯하면서도 중심을 잃은 듯 휘청거리면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내면을 간직한 천의 상처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무협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무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다시 재기에 나선 외팔이 무사 김광택, 따뜻한 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살수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아와의 불화를 겪는 무사 천이 부딪치는 세상은 정의와 도덕이 실종된 곳이다.

그 곳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사의 길을 걸어간다. 김광택은 정의와 도덕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삶의 진정성을 성찰하게 만들고, 천은 현실적 이해관계에 충실하면서 육체적인 기교에 탐닉하게 만든다.

똑같이 ‘무(武)’의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은 정신과 육체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이항대립 구도를 형성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승부를 겨룬다. 그들의 대결은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욕망이 우위를 점하는 세상에 대한 철학적 투쟁의 몸짓이 될 것이다.

최소한의 상식과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 혼돈의 세상에서 정의와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 있다. 그러나 무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무사로서의 삶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쪽 팔을 내놓아야 했던 김광택이나, 무협의 정도에서 벗어나 살수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역설적으로 무사로서의 낭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천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빛과 어둠 같은 존재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정의와 도덕이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상상력으로 구축된 허구의 세계가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을 지향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피바람 불어오는 정쟁(政爭)의 벌판에서 숙명의 대결을 펼치는 김광택과 천, 그들 가운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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